오늘 시편 103편의 말씀과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서 「인자하심이 이끄는 회개」라는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자책에서 사명의 자리로 옮겨 가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주님께서 낮은 곳까지 내려오셔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우리 마음이 아직 확정되지 못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재판정에서 땅땅땅 두드리시며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을 확증하시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시편 103편을 통하여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 결론의 말씀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반드시 움직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자리든, 복음의 자리든, 때로는 선교의 자리든 섬김의 자리든 희생의 자리든 헌신의 자리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반드시 움직인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입고도 내가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반드시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행동하는,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먼저 인자하심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3편의 배경은 출애굽기 34장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돌판을 받아 내려오지 않습니까? 내려와서 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론을 꼬드겨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주위를 돌면서 풍악을 울리며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해 주신 돌판을 던져 깨뜨리고 진노하지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오늘 우리가 읽은 8절의 말씀을,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이 풍부하다」는 이 말씀을 주신 때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고 찬양하던 때가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고 우상 앞에 절하며 하나님 앞에 범죄한 그때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배신을 행할 그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나는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하심이 풍부한 하나님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책하고 낙담하고 낙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하시는 말씀은 「너 왜 그렇게 살았어? 왜 그렇게 잘못했어? 왜 이렇게 좌절해?」 하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는 인자한 하나님이다. 나는 은혜로운 하나님이다. 나는 너에게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이다」 하고 당신을 소개해 주십니다. 이것이 자책하고 낙담하고 죄를 범한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녀나 다른 사람이 실수하고 잘못하면 꾸짖기에 바쁩니다. 먼저 그 잘못을 지적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지으셨습니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물론 죄가 들어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이제 우리 안에서 상처 입고 손상되고 잃어버렸던 그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고, 그 성품을 닮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그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가 인자하심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수나 부족함을 보면 먼저 화부터 내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지 마십시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그때그때 계속 지적하시고, 그 죄를 심판하시고 꼬치꼬치 물으신다면 이 땅에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긍휼이 많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하심이 많으신 그 성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도 그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씩 닮아 가는 인자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누가 실수하거나 잘못하거나,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들춰내고 판단하는 모습이 아니라 인자하고 어진 모습이 먼저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옮기셨습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하셨다고 말씀합니까?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그렇게 옮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늘의 높이를 재 보신 분이 계십니까? 지금은 과학적으로 대기권이니 대기권 밖이니 나누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기권이든 대기권 밖이든 다 하늘 아닙니까? 그 하늘의 높이를 재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냥 하늘 아래 서 있고 하늘 아래 살 뿐, 그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자로, 줄로 계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은 한계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재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 하늘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옮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라고 말씀합니다. 동쪽과 서쪽은 영원히 만날 수 없습니다. 이쪽으로 돌아서면 동쪽이고 저쪽으로 돌아서면 서쪽입니다. 동쪽과 서쪽은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고 겹칠 수 없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우리에게서 옮겨 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옮겨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보는 핵심이 자책 아닙니까? 하늘과 땅의 거리를 잴 수 없을 만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옮겨 주셨는데, 자책이란 무엇입니까? 그 멀리 옮겨진 죄를 다시 내 속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올 때 무거운 짐, 힘든 것을 짊어지고 와서 교회 문 앞에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 가벼운 마음으로 「내 짐 벗겨졌네」 찬양하며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합니까? 문 앞에 내려놓은 그 짐을 다시 짊어지고 갑니다. 자책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옮겨 주셨는데 우리가 자책하면, 그 옮겨진 죄를 다시 다 끌고 와서 내 속에 담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멀리 옮겨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머무르고 살아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옮겨 놓으신 그 자리입니다. 죄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 자리가 아니라, 내 죄를 하나님께서 옮겨 가신 그 빈자리에 우리가 서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가장 잘 살아 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자녀를 잃고 모든 재산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욥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다윗은 부하와 자녀와 모든 환경이 자신을 배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불렀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가운데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상황은 다 다릅니다. 그러나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를 찬양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저의 상황과 여러분의 상황이 같겠습니까? 사는 환경도, 하는 일도 모두 다릅니다. 가족끼리도 서로 상황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한 하나님을 높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상황에서도, 여러분의 상황에서도 우리의 죄를 옮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를 통하여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오늘 말씀의 결론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자책의 자리에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사명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로마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그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간다고 말합니까? 회개의 자리로 이끌고 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은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이끄는 견인력, 회개의 자리로 이끄는 힘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자들은 그것을 핑계로 계속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입은 사람은 움직입니다. 어디로 움직입니까? 회개의 자리로 움직입니다. 회개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내가 이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사명의 자리」라고 하면 뭔가 계시를 받고 음성을 듣고, 가난한 나라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로 가야 하는 사명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리고 우리가 계속 받아 온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명의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책하는 사람은 그 죄로, 그 짐으로 인하여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책은 나를 계속 내 속에 가두고 머무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인자하심을 입은 사람은 그 머무르던 자리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회개의 자리이고, 감사의 자리이고, 기쁨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은혜, 그것이 곧 우리가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을 크고 거창하게만 생각하면 짐이 되고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 그것을 사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타국에서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돌아갈 때 탕자는 이렇게 마음먹습니다. 「그래도 내가 아들이었으니 아버지가 나를 내치지는 않으실 것이다. 아버지 집에 가서 품꾼으로, 종으로 살아야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 품꾼으로 사는 것도 감지덕지하다고 생각한 것은 자책의 계산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자하심의 계산으로 그 아들을 대합니다. 아들은 「품꾼이 되겠습니다, 종이 되겠습니다」 했지만 아버지는 「아니다」 하며 그 아들을 껴안고 「잃었던 내 아들을 다시 찾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 잃어버린 자를 다시 아들로 삼으십니다. 자책하는 마음의 계산은 「나는 종」이지만, 인자하심의 계산은 「너는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오늘 우리가 자책의 자리에서 사명의 자리로, 내 속에 머물러 있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우리의 신분은 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의 설교를 통해 결론에 이릅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낮아진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두 번째,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재판정에서 그 옷을 벗기시고 「너는 죄가 없다,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 땅땅땅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그 보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입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은혜의 자리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은혜로 시작해서 순종으로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자책으로 시작해서 자책으로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시작해서 순종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드립니다. 우리 삶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에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지만, 살아가면서 자책할 일도 또 생길 것입니다. 낙심하는 일도, 무너지는 일도, 좌절하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여 내 속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그런 때가 올 때에도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자」,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인자하심으로 참아 오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그 인자하심이 오늘 우리를 두려움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지난 3주간 배운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책의 자리를 떠나 이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성실나눔교회 성도님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