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처음 언약의 돌판은 깨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34장에서 돌판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십니다.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1절). 돌은 모세가 다듬지만, 그 위에 말씀을 새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두 돌판을 손에 들고 다시 시내 산에 오릅니다(4절).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고, 모세는 동행을 간구하며,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세우십니다(10절). 모세는 사십 일 사십 야를 그곳에 머물렀고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28절).
하나님은 모세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십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6절). 34장에서 돌판을 새로 주시며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은 백성에 대한 판결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7절은 이어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조상의 죄가 저주로 대물림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천 대까지입니다. 에스겔 18장은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겔 18:20)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출애굽기 20장도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20:5)라고 합니다. 자손이 부모와 같은 죄를 이어 갈 때를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왕 히스기야에게서 므낫세가 나왔고, 악한 아버지에게서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서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죄의 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대물림되는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묵상을 위해 덧붙인 문장입니다.)
모세가 간구합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9절). 33장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33:3)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 그 이유를 들어, 우리가 그런 백성이기에 주님이 함께 가 주셔야 한다고 구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내놓을 것도 이 고백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해서 혼자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가 주시면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걷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앞서 가신 길입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29절). 모세는 백성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는 수건을 벗었습니다(33-35절). 6절의 "인자와 진실"은 요한복음의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난 빛은 사라지는 영광이었습니다(고후 3:7). 그러나 이제 우리를 비추시는 분은 늘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주님을 바라볼 때, 주의 영께서 우리를 예수님을 닮도록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해도 그 은혜가 말과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로 나타납니다. (묵상을 위해 요한복음 1:17과 고린도후서 3:7, 18을 덧붙입니다. 설교에서는 읽지 않은 구절입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