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그물을 잡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회복시키시고 사명을 맡기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도 우리 마음에는 이런 질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용서받았을까? 정말 내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이든 확정되어야 안심합니다. 예전에는 전세나 월세 계약서를 그대로 믿고 살았지만, 요즘은 동사무소나 등기소에 가서 확정일자를 받아야 마음이 놓입니다. 다툼이 생기면 재판정에 가져가 판사가 판결을 확정지을 때 비로소 편안해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런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했다, 일어서라" 하셨지만 눈에 보이는 문서나 도장이 없으니, 시련과 어려움이 오면 옛날 일이 다시 떠오르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일어섰다 넘어지기를 되풀이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생각이 내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곁에서 끊임없이 나의 잘못과 과거를 들추어내는 참소하는 자가 있습니다. "용서받았다더니 그 뒤로 말씀대로 살았느냐? 미움도 다툼도 그대로 아니냐? 너는 아직 멀었다." 이 소리에 흔들리면 우리는 자책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게 됩니다.
스가랴 3장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멸망했고, 바벨론 포로 생활 끝에 주전 538년 고레스 왕의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듬해 스룹바벨이 약 4만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공사는 멈추었고 그렇게 16년이 흘렀습니다. 성전도 신앙도 무너져 있던 그때,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합니다(1절). 본문의 배경은 재판정입니다. 여호수아는 피고인으로 서 있고, 참소하는 자가 그를 고발합니다. 고발의 내용은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러운」으로 번역된 말은 배설물이 묻은 옷을 가리킵니다. 그런 옷을 입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참소자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합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면서 무슨 예배를 드리느냐? 그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 같으냐? 너는 아직도 미워하고 아직도 다투지 않느냐?" 그 결론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 더러운 모습으로는 성전을 짓지 못하고, 그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는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고발 앞에서 한마디도 변호하지 못합니다. 그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대상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참소자입니다.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여호수아가 더럽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십니다. 책망의 근거는 여호수아의 깨끗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여호수아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그슬린 자국은 남아도 하나님께서 직접 건져 내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발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며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명하십니다(4절). "스스로 벗어라"가 아니라 "벗기라"입니다.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은혜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죄를 누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입니다. 사람을 위로할 때 우리는 대개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네가 잘했다" 하고 인정해 줍니다. 복음은 "너는 죄인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그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는지까지 말해 줍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4절). 그 값을 그냥 넘어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라는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옷부터 씻겨야 하는 대제사장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 종 싹」을 약속하셨습니다(8절). 그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갈아입을 옷이 필요 없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롬 8:34; 히 7:25-27; 요일 2:1). 그러면 이런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까요? 받으십니다. 우리가 깨끗해서가 아니라 새 옷을 입혀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히 10:19-22; 벧전 2:5).
본문에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책망을 받은 뒤에도 참소자가 쫓겨났다는 말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나는 승리를 노래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우리를 고발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참소자는 계속 우리 곁에서 고발합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는 괜찮다가도 누군가와 다투거나, 계획한 일이 틀어지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면 슬그머니 나타나 속삭입니다. "너는 깨끗이 용서받지 못했어. 그러니까 또 이렇게 실수하고 미워하는 거야." 확정된 판결을 다시 다투자는 듯 끈질기게 고발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리신 판결은 어떤 고발로도 뒤집히지 않는 최종 판결입니다. 참소자가 그 소리를 그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 판결을 잊고 내가 나를 다시 재판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속의 자책입니다.
끝난 재판의 문을 우리가 다시 열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에서 용서받은 죄를 붙들고 스스로를 다시 정죄하는 자리에 머물지 말고, 거기서 일어나 성령을 따라 사는 쪽으로 마음을 옮겨야 합니다. 로마서 8장 4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정죄를 피하려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풀려난 사람 안에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결단도 내 힘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방하신 성령께 맡기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옷을 스스로 벗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지금 나는 고발자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고발자의 법정에 서 있으면 끝없이 고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에 서 있으면 이미 깨끗하게 되었고 새 옷을 입었다는 그 판결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