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세기 23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나그네가 산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기 이름을 여러 가지로 소개합니다. 직분이나 직장, 누구의 부모,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대표이사다", "부장이다", "누구누구 엄마다", "누구누구 아빠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평생 가장 슬픈 날에 남들 앞에 서서 자기를 소개하며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6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62년이 지났지만 아브라함이 소유한 땅은 단 한 평도 없었고, 아내를 묻을 무덤 자리조차 없이 살아왔습니다. 세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믿음의 사람도 웁니다. 본문 1-2절에서 아브라함이 웁니다. 22장은 그의 아들을 그의 손으로 잡으려 했던 장이고, 23장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음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슬퍼하며 우는 장입니다. 주목할 것은, 사라가 죽은 장소가 마므레라는 것입니다. 마므레는 사라가 90세쯤에 하나님의 천사들로부터 언약의 자녀를 낳게 된다는 약속을 받은 장소입니다(창 18장). 그 장막 안에서 웃었던 곳, 바로 그곳에서 사라가 운명을 다했습니다. 약속을 들은 자리가 이제는 장례를 치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좋으면 슬픔이 줄어듭니까? 아닙니다. 신앙이 좋아도 슬플 수 있고, 오히려 더 슬퍼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슬픔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에 방향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피 우셨습니다(요 11:35). 중요한 것은 슬피 울고 나서 어떻게 했는가입니다. 본문 3절에 "아브라함이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되"라고 기록합니다. 충분히 울고 나서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도 울 수 있습니다. 마음껏 우십시오. 슬픔을 감추지 마십시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도 슬프고 괴롭고 힘든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보면 어떨까,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 때문에 울어야 할 자리에서 참는 모습이 목회자에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다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도 울고, 더 크게 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목회자도 울고, 운 뒤에는 다시 일어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세상이 붙여 주는 이름을 사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자입니다"라고 소개하는데, 헷 족속은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더 좋은 의미 같지 않습니까? 헷 족속도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신들 중에"라고 말했는데, 헷 족속은 "우리 가운데"라고 말을 바꿉니다.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그러니 이제 우리 중 하나가 되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내놓은 제안은 "우리 묘실 중에 좋은 것을 쓰십시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구한 것은 소유권, 기업, 땅이었는데, 그들이 제안한 것은 사용권이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분", 이보다 좋은 평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존중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러니 이제는 우리와 하나가 되십시오. 우리 중에 속하여 함께 어울리십시오." 아브라함은 그 호칭을 듣고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지 아니했습니다. 끝까지 나그네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들이 그냥 주려 했던 막벨라 굴을 돈을 지불하고 값을 치러서라도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쪽으로 결단했습니다.
여러분, 종교다원주의나 세속주의가 무엇입니까? "그래, 너도 인정해.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그러니 우리와 함께 어우러지자. 우리 세상에 너도 섞여서 살자."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기에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인정받고 싶어 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인정받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양보할 것인가 질문해 보십시오. 직장이든 사업이든, 인정받고 더 성장하고 승진할 수 있는 자리를 얻으려면 내가 양보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신앙은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아브라함이 보여 줍니다.
셋째, 나그네는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라 한 것은 체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매장할 막벨라 굴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7장 8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기업"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그 땅을 소유하겠다"라고 할 때의 그 단어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기업"이라는 그 말을 헷 족속에게 다시 사용합니다. "너희는 내게 이 굴을 주면서 사용하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나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히브리서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은 나그네가 아니라 그냥 노숙자입니다. 나그네는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돌아갈 집, 본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문 밖 나그네로 서서 무덤 한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완전한 나그네로 사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말씀하셨고, 자기 무덤조차 없으셔서 남의 무덤을 빌려 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무덤을 사서 소망을 심었고, 예수님은 무덤을 비워서 소망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그 어색함은 우리가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먼저 성문 밖에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어색하고 불편하고 힘든 것이 있지만,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그 처소에는 어색한 것도 불편한 것도 힘든 것도 없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산 막벨라 굴은 400년 뒤에도 아브라함의 소유로 존재했습니다. 이 굴에 아브라함이 묻히고, 이삭과 리브가, 레아, 그리고 야곱도 묻혔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죽으면서 "내 뼈를 막벨라 굴로 옮기라" 했고, 요셉도 죽어서 그 고향으로 옮겨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기업, 영원한 소유권을 붙든 것같이,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기업, 우리의 본향을 지키며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려 애쓰며 살고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 땅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로 살되,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기억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울었지만 다시 일어나는 신앙으로 살게 하시고, 세상이 붙여 준 이름보다 주님이 불러 주시는 이름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