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평생 가장 슬픈 날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23:4). 이때 그의 나이 137세, 약속을 받은 지 62년이 지났지만 소유한 땅은 한 평도 없었고, 아내를 묻을 무덤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사라가 죽은 곳은 마므레, 90세의 사라가 언약의 자녀를 약속받고 웃었던 바로 그곳입니다(18장). "아브라함이 … 슬퍼하며 애통하다가"(23:2). 신앙이 좋으면 슬픔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슬픔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에 방향을 줍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23:3) — 아브라함은 충분히 울고 나서 일어났습니다. 목회자도 웁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은 "당신들 중에 나그네"라 했는데, 헷 족속은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니이다"(23:6)라며 "우리 가운데"로 말을 바꿉니다. 좋은 평판 같지만, 그 존중의 대가는 "이제 우리와 하나가 되십시오"입니다. 그들이 내놓은 것은 무덤의 사용권이었고, 아브라함이 구한 것은 소유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호칭에 안주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나그네로 규정하며,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사서 자기 자리를 확보합니다. 신앙은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와 세속주의는 "너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할 테니 이제 우리와 섞이자"고 말합니다.
본향이 없는 사람은 나그네가 아니라 노숙자입니다. 나그네는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덤을 사서 소망을 심었고, 예수님은 무덤을 비워 소망을 이루셨습니다 — 그마저 남의 무덤이었습니다(마 8:20). 이 땅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어색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주님이 먼저 성문 밖에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막벨라 굴에는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레아가 묻혔고, 야곱과 요셉도 그리로 옮겨 달라 했습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