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묵상 · 2026.09.03

옷은 두고 나왔습니다

창세기 39:7-23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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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새벽 창세기 39장 7절부터 23절까지 말씀을 통하여 "옷은 두고 나왔습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제 아침에는 유다를 살펴보았습니다. 형제에게서 제 발로 떠나 내려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같은 방향으로,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려간 사람을 봅니다. 요셉은 스스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끌려 내려갔습니다. 1절이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라고 시작합니다. 한쪽은 걸어서 내려갔고, 한쪽은 끌려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사람의 내려감 위에 서로 다른 문장을 얹습니다. 유다의 장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요셉의 장에는 여덟 번이나 나오는 문장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오늘 새벽 창세기 39장을 보면서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형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첫째, 종의 집에서도 형통하십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는 일이 술술 풀린다는 뜻과는 결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이 말은 막힌 데를 뚫고 앞으로 밀고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편안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까지 그 사람을 밀고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이 붙은 요셉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종의 자리였습니다.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 주인의 재산 목록에 올라간 자리입니다. 17세에 팔려 30세에 총리가 되기까지 13년, 그 앞쪽이 바로 지금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자리에 "형통"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형통은 자리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리는 그대로인데 그 자리에 함께 계신 분이 있는 것입니다.

3절에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사람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습니다. 요셉이 주인을 붙들고 설교했다는 말은 한 줄도 없습니다. 그는 맡은 일만 하고 있습니다. 이 39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낱말이 "손"입니다. 요셉의 손에 집이 맡겨지고(4절), 소유가 다 맡겨지고(6절), 나중에는 옥의 죄수들까지 맡겨집니다(22절). 그의 손에 무엇이 놓이는가가 이 장의 핵심입니다. 5절에는 그 복이 요셉 한 사람을 넘어 애굽 사람의 집과 밭에까지 미치는 것을 봅니다. 한 신학자는 "선한 사람은 그가 사는 곳에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신앙은 애굽에서 설교함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맡은 일을 행함으로 드러났습니다.

둘째, 옷을 두고 나온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7절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을 합니다. 10절은 유혹의 성격을 알려 줍니다 —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한 번의 큰 파도가 아니라 날마다 다가오는 잔물결이었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도 대개 한 번에 불어오는 태풍이 아니라 날마다 오는 잔잔한 물결, 그 한 가지입니다.

요셉은 "주인에게 미안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9절에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까"라고 고백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집 안에서, 그는 "보시는 분"을 먼저 계산에 넣었습니다. 12절에서 여인이 옷을 붙잡자 요셉은 그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나갑니다. 이 옷은 겉옷입니다. 요셉에게 옷은 언제나 그의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아버지가 입혀 준 채색 옷은 형들이 벗겨 피를 묻혔고, 오늘 이 옷은 자기가 스스로 두고 나왔는데 그 옷이 그를 고발하는 물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옳게 산 사람이 늘 증거를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그날 남긴 유일한 증거는 그를 감옥에 넣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믿음은 결과가 보장될 때 하는 선택이 아닙니다.

20절에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라고 합니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종에서 죄수로 한 칸 더 내려갔습니다. 이번에는 명예까지 잃었습니다. 성실했기 때문에 맡겨졌던 집에서, 이제는 성실했기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라고 합니다. "인자"는 헤세드, 언약을 맺으신 분이 끝까지 지키시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39장 본문에서 감옥에 이르러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23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 2절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요셉의 자리는 더 내려갔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그 내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39장은 요셉이 잘 견뎌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한 장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덟 번이나 기록됩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신 것은 요셉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종 한 사람의 자리를 통하여 훗날 야곱의 온 집이 애굽에서 살아남고, 그 백성에게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됩니다.

이 문장이 한 번 끊어진 분이 계십니다. 요셉은 옷을 두고 나왔지만, 예수님은 옷이 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리셨고 군인들이 그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요한복음 19장). 요셉은 억울하게 갇혔지만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으셨고,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요셉과 함께 계시던 그 하나님이 아들에게는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버림받으신 그 자리가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이 마지막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 20절).

오늘 아침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종의 집이든 감옥이든, 그 자리에 붙어 있는 문장은 하나입니다 —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니라."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시니라. 이 한 문장을 기억하시고 오늘 하루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자리가 바뀌는 것을 형통이라고 부르며 살았습니다. 종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같은 말씀을 해 주신 아버지를 오늘 아침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우리를 흔드는 그 한 가지 앞에서 견디려고만 하지 말고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억울한 자리에서도 해명하기보다 맡겨진 일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옳게 살고도 증거를 남기지 못한 날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보고 계셨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옷까지 벗기신 채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늘의 적용

  • 1자리가 바뀌기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그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며 오늘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합니다.
  • 2날마다 나를 흔드는 "그 한 가지" 앞에서, 아무도 보지 않아도 "보시는 분"을 먼저 계산에 넣습니다.
  • 3옳게 하고도 오해받고 증거를 남기지 못한 날에, "하나님은 이미 보고 계셨다"를 붙들고 해명 대신 맡은 일로 돌아갑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자리가 바뀌는 것을 형통이라고 부르며 살았습니다. 종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같은 말씀을 해 주신 아버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우리를 흔드는 한 가지 앞에서 견디려고만 하지 말고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억울한 자리에서도 해명하기보다 맡겨진 일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옳게 살고도 증거를 남기지 못한 날에 하나님께서 이미 보고 계셨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옷까지 벗기신 채 버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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