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잊었고 그분은 기억하셨습니다 창세기 40:9-23 · 새벽묵상 · 2026-09-04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fiwhI0I5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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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창세기 40장 9절에서부터 23절까지의 내용으로 "그는 잊었고 그분은 기억하셨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이 새벽에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감옥에 갇힌 요셉을 어제 보았습니다. 옷은 두고 나왔고 몸은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문을 곧바로 열어 주지 않고, 창세기 40장 한 장을 통째로 그 감옥에서 보내는 것으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신지요? 누군가 한 마디만 해 주면 풀릴 것 같은데 그 한 마디가 오지 않는 시간, 그것을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 바로 그 시간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라고 23절에 기록되어 있죠. 오늘 새벽 그 자리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함께 듣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 번째, 감옥에서도 남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40장 1절에 그 감옥에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입니다. 이들은 왕의 식탁을 맡은 최측근인데, 왕에게 범죄하여 둘이 갇히게 됩니다. 그곳이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고 3절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요셉이 그들을 섬기고 봉사하죠. 죄수가 죄수를 시중드는 자리를 요셉은 자처해서 행하게 됩니다.
6절에 보면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라고 기록합니다. 근심의 빛이라는 것은 얼굴이 상해서 어두운 빛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억울하기로만 하면 그 감옥에서 요셉보다 더 억울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형제에게 팔렸고, 모함을 당했고, 그리고 갇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어쩌면 자기 얼굴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눈에는 남의 얼굴이 보였다고 7절이 기록해 주고 있죠. 그래서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라고 요셉이 물어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은 사람을 좁게 만듭니다. 아픈 사람은 자기 아픔밖에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서 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그 표시는 큰 기적이 아닙니다. 자기 일로 꽉 찬 자리에서도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다는 표시라는 것을 오늘 보여 주고 있습니다.
8절에서 보면 두 사람이 꿈 이야기를 요셉에게 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애굽은 해몽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넘치던 나라였지만, 감옥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죠. 바로 그 순간이 요셉에게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꿈을 풀 줄 압니다"라는 한 마디면 그 두 사람의 눈이 요셉에게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죠.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바로 이것이 요셉의 모습입니다.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도(창세기 39장 9절), 훗날 바로 앞에서도(창세기 41장 16절), 곡식을 사러 온 형들 앞에서도(창세기 42장 18절), 그의 첫 마디는 언제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되죠.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아, 내가 할 수 있는데", "내가 딱인데", "바로 내 얘기인데" 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누군가가 나를, 나의 능력을 칭찬하거든 속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지킨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을 지키는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 두 번째, 사람은 잊었고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꿈을 이야기하죠. 포도나무 세 가지, 익은 포도송이, 바로의 잔. 이렇게 꿈의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라"라는 요셉의 해석이 등장하죠.
또 떡 굽는 관원장도 용기를 얻어 자기 꿈을 꺼냅니다. 흰 떡 세 광주리와 새들이죠. 그런데 요셉의 해석은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라"라고 해 줍니다.
사실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보면 앞부분은 글자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라는 표현을 똑같이 해 주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머리를 들다"라는 것은 사람을 높인다는 뜻도 있지만, 목을 벤다는 뜻으로도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보면 두 사람은 정말로 나란히 머리를 들게 되죠. 한 사람은 다시 잔을 들었고, 한 사람은 나무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같은 말이 한 사람에게는 살리는 말이 되었고, 한 사람에게는 죽이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나쁜 해석을 좋게 고쳐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해석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유혹은, 듣는 사람이 좋아할 만큼만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요셉이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죠. "당신이 잘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이렇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여기 "생각하다"라는 것은 "기억하다"라는 말인데, 떠올리는 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실제로 돌보는 데까지 가는 말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헤세드인데, 갚아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정에 매여 베풀게 되는 사랑을 헤세드라고 하죠. 그래서 요셉은 권리가 아니라 은혜를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청합니다. "나를 기억해 주고, 나에게 갚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를 정을 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런데 15절에 보면 그는 자기 결백만 짧게 말할 뿐, 자기를 판 형들도, 모함한 여주인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가장 하기 쉬운 일이 남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것인데, 요셉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죠.
그런데 23절 말씀에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라고 기록해 줍니다. 요셉이 구한 그 기억은 오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1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만 이 년 후에." 두 해가 지난 것이죠. 잊힌 채로 두 해를 더 지났다고 기록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에 걸어 두고 기다리는 일이 있으십니까? 혹 여러분이 기억하면서 기다리는 일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잊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잊으신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그 이름을 여러분의 원망하는 목록에서 기도하는 목록으로 한번 바꿔 보시기를 바랍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말이 "자카르"인데, 처음 쓰인 곳은 바로 홍수 가운데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창세기 8장 1절). 물이 온 땅을 덮어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때에 하나님이 기억하시자 물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잊었다가 생각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하신 대로 이제 손을 대시고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는 헤세드가 없었습니다.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 헤세드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잊고 지낸 두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시편 기자는 105편 19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잊어버린 시간, 잊힌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준비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셉을 기억하신 것은 요셉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잊힌 두 해가 지나야 야곱의 온 집이 애굽에서 살아남게 되고, 또 그 백성에게서 마침내 한 분이 나오시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똑같은 부탁을 받은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도 두 사람 사이에, 감옥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계셨고, 그날 그 두 사람의 운명도 갈라졌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장 42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좌우편에 있는 강도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셉은 나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고 기다렸지만 그것은 잊혔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을 때에 주님은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려고, 그분이 먼저 잊힌 자리, 버림받은 자리까지 내려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을 잊은 사람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기 때문인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49장 16절 말씀에 보면 그분의 손바닥에 우리가 새겨져 있다고 기록해 주고 있어요. 이 말씀으로 오늘 하루도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치신 자리에서 오늘 아침을 맞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사람이 잊었다고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이 아님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억울함으로 눈이 가려지지 않게 하시고, 곁에 있는 한 사람의 어두운 얼굴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진 것의 주인이 우리가 아님을 먼저 알게 하여 주시고, 기다리는 시간이 단련하시는 시간임을 오늘 하루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잊혔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심을 기억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십자가에서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그 한 마디를 잊지 아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