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옷은 두고 나오고 몸은 갇힌 요셉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감옥 문을 곧바로 열어 주지 않습니다. 40장 한 장을 통째로, 요셉이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기록합니다.
누군가 한 마디만 해 주면 풀릴 것 같은데 그 한 마디가 오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절). 요셉이 구한 것은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기억해 달라, 그 한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잊힌 사람의 이야기로 이 장을 닫지 않습니다. 사람이 잊은 그 자리에서 성경이 말하는 것은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얼마나 잘 견뎠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이 끊어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기억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입니다.
40장이 시작되면 그 감옥에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왕의 식탁을 맡은 최측근이 왕에게 범죄하여 갇힙니다. 그곳이 곧 요셉이 갇힌 곳이었습니다(3절). 그리고 4절은 요셉이 그들을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죄수가 죄수를 시중드는 자리입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6절). 억울하기로 하면 그 감옥에서 요셉보다 억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형제에게 팔렸고, 모함을 당했고, 갇혔습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자기 얼굴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난은 사람을 좁게 만듭니다. 아픈 사람은 자기 아픔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눈에는 남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7절).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표시는 대단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로 꽉 찬 자리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그것이 표시였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8절). 애굽은 해몽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넘치던 나라였지만 감옥 안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에게는 기회였습니다. "내가 꿈을 풀 줄 압니다" 한 마디면 두 사람의 눈이 자기에게 쏠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8절).
이것이 요셉입니다.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도(39:9), 훗날 바로 앞에서도(41:16), 곡식을 사러 온 형들 앞에서도(42:18), 그의 첫 마디는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내가 할 수 있는데", "그거 내 얘기인데" 하며 나를 드러낼 자리를 먼저 찾습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꿈을 꺼냅니다. 포도나무 세 가지, 익은 포도송이, 바로의 잔. 요셉의 해석은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13절)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도 용기를 얻어 자기 꿈을 꺼냅니다. 흰 떡 세 광주리와 새들. 그런데 해석은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19절)였습니다.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우리말로는 앞부분이 한 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여기서 "머리를 들다"는 사람을 높인다는 뜻도 되고, 목을 벤다는 뜻도 됩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두 사람은 정말로 나란히 머리가 들립니다. 한 사람은 다시 잔을 들었고, 한 사람은 나무에 달렸습니다. 같은 말이 한 사람에게는 살리는 말이 되었고 한 사람에게는 죽이는 말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나쁜 해석을 좋게 고쳐 말하지 않았습니다. 해석이 자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유혹은, 듣는 사람이 좋아할 만큼만 말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요셉이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꺼냅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내소서". 여기 "생각하다"는 "기억하다"라는 말인데, 떠올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돌보는 데까지 가는 말입니다. "은혜"는 헤세드입니다. 갚아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정에 매여 베푸는 사랑입니다. 요셉은 권리가 아니라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자기 결백을 짧게 말할 뿐, 자기를 판 형들도 모함한 여주인도 한 마디 꺼내지 않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가장 하기 쉬운 일이 남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것인데,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3절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구한 그 기억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4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 이 년 후에." 잊힌 채로 두 해가 더 흘렀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헤세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 헤세드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기억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는 자카르인데, 이 말이 처음 쓰인 곳은 홍수 가운데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창 8:1). 물이 온 땅을 덮어 소망이 없어 보이던 그때에 하나님이 기억하시자 물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잊었다가 생각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약하신 대로 이제 손을 대시고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잊고 지낸 그 두 해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잊힌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준비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셉을 기억하신 것은 요셉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두 해가 지나야 야곱의 온 집이 애굽에서 살아남고, 그 백성에게서 마침내 한 분이 나오시게 됩니다.
성경에는 요셉과 똑같은 부탁을 받으신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도 두 사람 사이에 계셨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였고, 그날도 그 두 사람의 운명은 갈렸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요셉이 구한 기억은 잊혔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구한 기억은 잊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차이는 강도가 요셉보다 나은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입으로 죗값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차이는 부탁을 받으신 분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기억하시려고 그분이 먼저 잊힌 자리, 버림받은 자리까지 내려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를 잊은 사람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6).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