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세기 44장 16절에서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찾아내신 죄, 대신 서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이 새벽에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번 창세기 43장에서, 유다가 아버지 앞에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하며 자기 자신을 걸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창세기 44장은 그 말이 시험대에 오르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말했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그가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20여 년간 덮어두었던 일이 마침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찾아내신 죄입니다.
13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가니라"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을 찢는다는 말은 슬픔을 참지 못해 겉옷을 여러 갈래로 찢어버리는 몸짓을 말합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이 동작을 한 사람이 두 명이었습니다. 빈 구덩이를 본 르우벤과, 피 묻은 채색옷을 받아든 야곱이 바로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형들이 옷을 찢었다는 말은 37장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형들이 자기들의 옷을 찢는 행동을 보입니다.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으니 형들은 베냐민만 두고 떠나도 되었습니다. 마치 37장에서 요셉 하나를 구덩이에 두고 떠났던 것처럼, 지금도 베냐민만 두고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떠나지 않고 전부 성으로 함께 돌아옵니다. 이 변화를 만든 것은 형들의 결심이 아닙니다. 20여 년 동안 그들을 놓지 않으신 하나님이 이들을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16절에서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여기서 찾아낸다는 말은 본문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우리말 성경이 잔을 두고 "발견되었다"라고 옮긴 그 말도 바로 이 찾아냈다는 말입니다. 자루를 뒤져 돈을 찾아내었고, 또 잔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이제 하나님이 찾아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유다는 잔을 훔쳤다고 자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혐의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죄는 20여 년 전 동생을 구덩이에 넣고 애굽으로 팔려가게 한 그 일입니다. 그 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여러분, 시간은 죄를 지우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서운 소식으로만 듣지 마십시오. 창세기 42장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그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다는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 앞에서 말합니다. 죄를 찾아내시는 손은 끝내시려는 손이 아니라 돌이키시려는 손입니다. 유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대신 서는 사람입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유다가 총리에게 가까이 가서 창세기에서 가장 긴 연설을 시작합니다. 이 연설에서 유다는 오직 아버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부르는 말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쓰던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30절에서는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또 28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옮기기도 합니다.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라는 표현입니다. 37장에서 피 묻은 옷을 받아든 야곱의 고백이었고, 그 옷을 보낸 사람이 바로 형들이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상처를 아버지의 말 그대로 되받아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33절에서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돌려보내소서."
여기서 "대신하여"라는 말은 당시에 흔히 쓰이던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놓인 장면들을 보면 한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숫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드려졌을 때 사용된 표현이 이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7장에서 "무엇이 유익할까, 그를 팔자"라고 했던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동생을 팔아 값을 챙기려던 손이, 이제는 동생의 자리에 자기를 밀어 넣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우리를 대신해 값을 치르신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질 수 있습니다. 내 몫이 아닌데 아무도 하지 않아 남아 있는 일을, 이제는 우리가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대신 서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베냐민을 살린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요셉이 자기를 드러내면서 풀린 것이지, 유다의 제안이 값을 치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약에서 베드로는 그 자리에 실제로 서 계신 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입니다.
모리아산의 숫양도, 창세기 44장의 유다도 그 자리를 가리키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자리에 서신 분은 유다의 지파에서 나신 우리 예수님이라는 것을 히브리서 7장 1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무엇을 찾아내셨는지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는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대신해 서신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셔서, 오늘도 그 예수님을 힘입어 승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찾아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덮어두면 없어지는 줄 알았던 우리의 일들을 오늘 아침 찾아내게 해 주셔서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 손이 끝내시려는 손이 아니라 돌이키시려는 손인 것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하나님 찾아내신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