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창세기 43장에서 유다는 아버지 앞에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하고 자기를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이 시험대에 오르는 자리입니다. 요셉의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고, 형들은 다시 성으로 끌려옵니다. 22년 동안 덮어 두었던 일이 이 아침에 드러납니다.
유다는 잔을 훔쳤다고 자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 혐의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16절). 그가 말하는 죄는 잔이 아니라, 22년 전 동생을 구덩이에 넣고 애굽으로 팔려 가게 한 그 일입니다. 잔을 찾아내던 그 말로 하나님이 죄를 찾아내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18절부터 34절까지는 창세기에서 가장 긴 연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긴 말 속에 유다는 오직 아버지 한 사람만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자기를 아우의 자리에 밀어 넣습니다. 본문은 여기서 멈추지만, 성경은 그 자리에 실제로 서서 값을 치르신 분을 따로 말합니다.
13절입니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가니라." 옷을 찢는다는 이 몸짓을 창세기 37장에서 한 사람은 둘이었습니다. 빈 구덩이를 본 르우벤과, 피 묻은 채색옷을 받아 든 야곱입니다. 그때 형들이 찢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형들이 찢습니다.
잔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으니 형들은 베냐민만 두고 떠나도 되었습니다. 37장에서 요셉 하나를 구덩이에 두고 떠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떠나지 않고 전부 성으로 돌아옵니다. 이 변화를 만든 것은 형들의 결심이 아닙니다. 22년 동안 그들을 놓지 않으신 하나님이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찾아내다'로 옮긴 말은 이 장에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이 잔을 두고 '발견되었다'로 옮긴 그 말이기도 합니다. 자루를 뒤져 돈을 찾아내고 잔을 찾아내던 그 말로, 유다는 이제 하나님이 찾아내신 것을 말합니다.
22년이 지났지만 그 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시간은 죄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서운 소식으로만 듣지 마십시오. 창세기 42장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그 일을 말했습니다. 이제 유다는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 앞에서 말합니다. 죄를 찾아내시는 손은 끝내시려는 손이 아니라 돌이키시려는 손입니다.
유다의 연설에서 부르는 말이 달라져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쓰던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입니다. 30절에서는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합니다. 28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피 묻은 옷을 받아 든 야곱의 말이고, 그 옷을 보낸 사람이 형들이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상처를 아버지의 말 그대로 되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3절입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대신하여'로 옮긴 말 자체는 흔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놓인 장면이 같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숫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드려졌을 때 쓰인 말이 이 말이었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무엇이 유익할까, 그를 팔자" 했던 사람이 바로 이 유다입니다. 동생을 팔아 값을 챙기려던 손이 이제 동생의 자리에 자기를 밀어 넣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베냐민을 살린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요셉이 자기를 드러내면서 풀린 것이지, 유다의 제안이 값을 치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실제로 서신 분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모리아 산의 숫양도, 창세기 44장의 유다도 그 자리를 가리키기만 했습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서신 분은 유다의 지파에서 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히 7:14).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