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2026.08.02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믿음의 능력)

창세기 18:9-15 · 마가복음 9:14-29 · 빌립보서 4:11-13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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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 구절의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 믿음의 능력"이라는 주제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사라가 장막에서 웃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의 날씨에 아흔아홉 살 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맞이합니다. 손을 씻기고 발을 씻기고 소를 잡고 맛있는 음식을 내어 최대한 대접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에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속으로 웃고, 장막 안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사라도 웃습니다. 왜 웃습니까? 조롱이나 비웃음이 아니라 자기 신세를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후사를 주겠다"라고 하신 약속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75세도 적은 나이가 아니었지만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고, 노력도 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여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낳게 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은 "사라에게 여인의 생리가 끊어졌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년에 그 사라에게 자녀가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며, 14절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사라에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라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2천 년 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의 사건을 통해 이 말씀을 하시고, 얼마 뒤 늙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 세 사건을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첫째, 능력의 근거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능하지 못한 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팔라"인데, "하나님께는 기이한 일, 놀라운 일"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홍해 앞에 세우시고,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홍해가 갈라졌을 때에도 쓰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부른 찬송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에서도 다윗이 늘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기이한 일들을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고, 그들로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25년 동안 자녀를 갖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노력으로 태어난 아들이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자녀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삭을 언약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25년 동안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완전히 포기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셨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삭을 잉태한 것이 아니라, 몸이 완전히 죽었다고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에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신 사건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앞에는 바다이고 뒤에는 애굽 군사가 쳐들어올 때 이스라엘이 완전히 포기했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골짜기로 인도하시고 "아주 마른 뼈들"을 보여 주십니다. 오래되어 생기를 완전히 잃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뼈들입니다. 그런 뼈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생기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데, 죽은 지 나흘째였습니다. 3일까지는 뭔가 기대할 수 있는 기간인데,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어 다시 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도저히 살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다 포기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그가 무덤에서 나와 다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아직 여력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간사하여, 여력이 남아 있으면 "내가 했기 때문에, 내가 도움을 얻었기 때문에, 내가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라고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낮은 순간, 완전히 포기한 순간까지 몰고 가십니다. 그 이유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다"라는 것을 알게 하심입니다. 창세기 18장 14절에 "기한이 이를 때에"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기한이 이르렀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 노력을 다 포기한 그때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신 즉시 세상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수 있었지만, 3년 반의 공생애 동안 제자를 만드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을 다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둘째, 능력의 통로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웃었던 그 사건에서 2천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두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형체가 변하고 빛같이 밝아지는 하늘의 영광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시니, 서기관들이 제자들과 다투고 있고, 귀신 들린 아이를 안은 아버지는 제자들을 원망하고,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이 산 아래의 상황이 오늘 우리의 상황입니다. 산 위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있는 상황이지만 잠깐이고, 산 아래는 부딪히고 싸우고 헐뜯고 능력이 안 나타나서 쩔쩔매는 상황입니다. 예배드릴 때는 은혜를 받지만 주차장으로 나가면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으니 다시 오라"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믿음도 고쳐 주시고 아들의 귀신도 쫓아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이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서 기도할 수 없어, 믿음이 약해서 교회 가기가 쉽지 않아"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순서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생긴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와서 "믿음이 없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 없음을 고백하는 그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를 건넙니다. 한 사람은 얼음이 깨질까 봐 두려워 벌벌 떨며 얼음 위를 기어서 가고, 또 한 사람은 담대히 저벅저벅 걸어서 갑니다. 두 사람 중 누가 호수를 건넜겠습니까? 둘 다 건넜습니다. 두려움에 떤 사람도 시간은 늦었지만 그 호수를 건넜습니다. 호수를 건너는 것은 그 사람의 담대함이 아니라 얼음의 두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우리의 담대함이나 믿음이 아니라, 얼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능력의 목적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우리는 가장 많이 오해합니다. 수험생이 시험 잘 보게 해 달라고, 운동선수가 팔에 문신으로 새기고, 회사 액자에 걸어 놓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글을 쓸 때 그의 위치는 감옥이었습니다. 11-12절에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이 말은, 바울이 감옥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고백입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의 가장 큰 이슈는 "에고",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어떤 환난이 와도 "내 힘으로 굳건히 서서 견뎌야지, 버텨야지" 하며 자기 힘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것을 배웠다"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으로 배웠습니까? 고난당하면서 배웠습니다. 매 맞는 자리에서, 파선당하는 배에서, 동역자들이 배신하는 곳에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라는 이 말은 성공의 단어가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성공시킬 수 있다"라는 말이 아니라 견딤의 말입니다. "내가 매도 맞고 파선당하고 배신당하는 모든 고통 중에 있지만, 감옥에서 생각해 보니 내가 배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견디도록 도우시는 힘이었다"라는 고백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성공이 아니라 견딤, 인내입니다.

창세기 18장은 능력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마가복음 9장은 능력의 통로가 믿음임을, 빌립보서 4장은 능력의 목적이 견딤과 인내임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다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십자가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흐르도록 기도하시며 "이 잔을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셔서 잔을 옮기셨습니까? 잔은 옮겨지지 아니했습니다. 대신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능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아침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며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당 못할 일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연약한 마음, 계산하는 마음, 다 내려놓지 못한 마음이 있다면 용서하여 주시고 다 내려놓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고, 기다리는 자리에서 정한 기한이 이를 때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그 때가 되었을 때에 은혜와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그 사랑을 힘입어 이 한 주간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적용

  • 1아직 내려놓지 못한 마음, 계산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시간표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 2"믿음이 없어서 기도할 수 없다"는 순서를 바꾸어, 와서 믿음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 3믿음의 능력을 성공이 아니라 견딤으로 이해하고,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는 감당 못할 일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연약한 마음, 계산하는 마음, 다 내려놓지 못한 마음이 있다면 용서하시고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시고, 정한 기한이 이를 때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은혜와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그 사랑을 힘입어 이 한 주간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