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가 장막에서 웃습니다. 조롱이 아니라 자기 신세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 나이 아흔에,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라에게만이 아니라, 2천 년 뒤 예수님(막 9장)과 옥중의 바울(빌 4장)에게로 이어집니다.
"능하지 못한 일"(팔라)은 하나님께는 "기이한 일, 놀라운 일"입니다. 이 단어는 홍해가 갈라진 사건(출 15장), 다윗의 시편에서 쓰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25년을 노력했지만, 이삭은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자녀여야 했습니다.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롬 4:19)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완전히 내려놓은 순간에 일하십니다 — 홍해 앞의 진퇴양난(출 14장), 아주 마른 뼈들(겔 37장),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요 11:39). 우리에게 여력이 남아 있으면 "내가 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창 18:14) — 곧 우리가 자신의 것을 다 내려놓는 때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변화산의 영광 아래에서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쩔쩔맵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하자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십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 이전부터 이미 존재합니다. 믿음은 물탱크가 아니라 수도꼭지입니다 — 이미 가득한 물이 내게로 오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깁니다(마 17:20). 믿음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 곧 누구를 바라보느냐입니다.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하자, 예수님은 그 믿음도 고쳐 주시고 아이도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엡 2: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성공의 문구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 글을 감옥에서 썼고,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4:11)고 합니다. 매맞는 자리에서, 파선당하는 배에서, 동역자가 배신하는 곳에서 배운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성공이 아니라 견딤, 인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기도하셨지만 잔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잔이 옮겨지지 않은 대신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