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2026.09.06

임하고 완성되는 하늘

사도행전 2:1-4 · 요한계시록 21:1-5 · 하늘을 열면 땅이 열린다 (5부) · 2026.09.0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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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고 완성되는 하늘 사도행전 2:1-4, 요한계시록 21:1-5 · 주일설교 · 2026-09-06 시리즈: 하늘을 열면 땅이 열린다 (5부·마지막)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3aSqVdHB4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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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도행전 2장과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을 통하여 "임하고 완성되는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하늘을 열면 땅이 열린다" 시리즈 다섯 번째, 마지막 시간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이 다섯 주간의 말씀을 지나오며 한 가지 개념을 정리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열면 땅이 열린다"라는 말은, 하늘이 열리면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해지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이 열려 있고, 그 열린 하늘 아래 우리가 서 있고, 그리고 믿음의 성도 된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의 막힌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땅이 열린다"라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번영신학이나 기복주의 신앙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늘을 열었으니 이제 우리가 땅에서 형통하게 살겠지, 하는 의미가 아니라, 열린 하늘 아래 믿음의 성도들이 서 있고 그들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생각하고 말씀을 봅니다.

우리는 넉 주 동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도망치던 밤 돌베개를 베고 하늘 문을 보았고, 이사야는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말라기에서는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겠다고 하셨고, 지난주 요단강에서는 그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갈라진 하늘이 예수님 한 분 위에서 끝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났습니다. 그 하늘이 갈라지며 나타난 놀라운 역사가 예수님 한 분에게서만 끝났는가를 우리는 질문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그 내려오심이 어디에서 끝나는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 첫 번째, 때가 다 차서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사도행전 2장 1절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이르매"라는 말은 단지 날짜가 되어 그날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득 차올랐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으면 모래가 조금씩 떨어지다가 마침내 마지막 한 알까지 다 떨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 상태를 "그때가 이르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득 차올랐습니까?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사십 일 동안의 동행, 백이십 명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그 열흘, 그 마지막 열흘까지 다 채워졌을 때 성령이 오셨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신 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부터 계산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시간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늦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시간을 보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보았지만 말라기 3장 1절에서 말라기가 "한 선지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내리라"라고 예언했는데, 그 약속은 사백 년이라는 기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일흔다섯 살 때에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창하리라" 하셨는데, 이십오 년이 지난 후에 달랑 한 명의 언약의 자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삭을 통해 사백오십 년쯤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이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것은 늦었다,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들을 채우고 그 시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시간이 지금 점점 더 채워지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라고 기록합니다. 이 성령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우리가 다섯 편의 설교를 통해 계속 확인하는 것은 방향이 언제나 한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벧엘에서 야곱이 하늘 문을 본 그때부터 오늘 말씀까지 방향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밑에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백이십 명이 열흘 동안 기도했지만, 성령을 내려오게 한 것은 그들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하늘을 여는 도구가 아니라, 하늘이 열릴 것을 알고 그 아래 서 있는 자세입니다.

■ 두 번째, 그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3절에 성령이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을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해 설명합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리고 덧붙입니다.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성령께서는 이 요엘의 예언처럼 남종과 여종, 어떤 신분도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한 곳, 한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 산 위에 임재하여 머물러 계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성막을 지었을 때에도 그 성막 위 한 장소에 머물러 계셨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고 그 지성소 한 장소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은 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각 사람 모두에게 임하셨습니다. 신분이나 나이나 모습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성령을 받은 우리를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기록합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우리가 나가면, 이 예배당에 하나님을 두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갈 때에 성령님도 함께 가십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는 걸어 다니는 예배당이요, 걸어 다니는 성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오순절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는 불이 그 산 위에만 있었고, 백성들은 손도 대지 못하였고, 율법은 돌판에 기록되어 모세가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성령의 불이 사람 위에 내려왔고, 그 법은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날짜에 같은 일을 하셨는데 훨씬 더 가까이 오셨습니다. 유월절이 지나고 오십 일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모였을 때 하나님은 산 꼭대기에 임하셨고, 모세가 두 돌판에 새겨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오십 일이 지난 이때에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각 사람의 마음속에 새기셨습니다.

시각적으로 봅시다.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영광과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어느 것이 더 가까워졌습니까? 오순절 성령이 훨씬 더 가까워졌습니다. 두 돌판에 새겨진 말씀과 마음속에 새겨진 말씀, 어느 것이 더 가깝습니까? 마음속에 새겨진 말씀이 더 가깝습니다. 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사랑이 훨씬 더 우리 가까이 왔습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 21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하셨는데, 지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드릴 수 있습니까? 닦아 드리려면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이전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설교하면서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성령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왔습니다.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상징합니다. 그 하나님의 손이 예수님을 높이시고, 그 예수님이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시고, 그 받으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부어 주셨다"라는 것은 양동이로 쏟아붓듯 우리에게 쏟아 주셨다는 말입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 위에 임하셨던 그 성령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선물을 그 아들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왜 힘이 됩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 열심의 대가가 아니라,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선물의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잘하면 더 가까이 오고 못하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받은 그 성령은 그 누구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떠나신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실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가야만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는데, 이전에는 나에게만 성령이 임했지만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 성령이 너희 각 사람에게도 다 임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성령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더 넓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 아니하셨다면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그 떠나신 예수님을 통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오히려 그 성령이 더 넓어졌습니다. 이렇게 넓어진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 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먼저 받은 우리가 그들에게 성령을 전파하고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의 성격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겁 많은 사람이 겁을 낸 채로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함이 생긴 다음에 전도하고 증언하려고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 순서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성령은 말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담대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만, 겁이 없어져서 담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을 보거나 놀랄 일이 생기면 금방 담대함을 잃어버리고 겁먹은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성령님, 담대함을 주십시오"라는 말은, 겁이 많은 사람이지만 어디에 있든지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다니엘이 이방인의 왕 앞에 섭니다. 배짱이 두둑하고 간이 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이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력 훈련이나 극기 훈련을 해서 담력을 얻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전도 훈련도 많이 받고 방법과 요령도 배우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만나 말할 수 있는 힘이 그 자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훈련과 방법도 중요하지만, 정작 말할 힘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부족하지만 누구를 만나든 어느 장소에서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담대함입니다.

■ 세 번째, 하나님이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통해 봅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을 우리가 올라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하늘나라에 간다, 천국에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려 주는 마지막 그림은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네 번째 설교까지 다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마지막 천국만은 우리가 올라가겠지 생각하지만, 요한계시록 마지막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이 세상이 아주 없어지느냐 고쳐지느냐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도시를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비유하십니다. 도시 이야기, 건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사람 이야기, 신랑 신부의 이야기로 바꾸십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 새 예루살렘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동산 개념의 도시가 아니라, 완성된 교회, 승리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도시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완성하실 그림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성된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완성되는 때는 하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다시 내려오시는 그때,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때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작품, 하나님의 그림의 완성은 어떤 건물이나 도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3절에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장막"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치던 성막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할 때 "거하시다"가 바로 장막을 치신다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베들레헴에서는 살로 된 천막을 치고, 오순절에는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고, 마지막에는 아예 하나님께서 짐을 다 옮겨 오십니다. 임시로 만든 천막이 아니라 이제 영원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본문은 "함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실 때마다 쓰시던 그 단어 "함께"를 사용하십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야곱이 돌 하나 위에 세우고 "하나님의 집"이라 고백했던 그것을 이제 하나님께서 통째로 다 옮겨 오십니다.

그 하늘이 올 때에는 눈물을 씻겨 주신다고 기록합니다. 누군가 위로해 주면 그 순간에는 눈물이 그칩니다. 그런데 한두 달 지나 과거의 기억이 나면 또 눈물이 흐릅니다. 얼마 전 한 성도님 가정에 장례가 있었고, 그때 다 함께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의 위로로 눈물이 그쳤지만, 명절이 다가오고 다시 떠올리면 또 눈물이 납니다. 위로를 받았는데 왜 또 눈물이 납니까?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위로를 받아도 또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에는 눈물을 씻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원인들을 다 제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 눈물까지도 다 제거해 주십니다.

마지막 5절에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것은 새로운 것을 따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고쳐서 새롭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가정도, 이 세상도 폐기나 철거의 대상이 아니라 회복의 대상입니다.

■ 결론

우리는 다섯 주를 달려왔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닫힌 하늘 앞에 서 있었고, 이사야는 하늘을 갈라 달라고 했고, 말라기는 하늘 문을 열겠다고 약속하셨고, 요단강에서는 그 하늘이 갈라졌고, 오순절에는 그 갈라진 하늘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각 사람 위에 부어 주셨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아예 통째로 우리 위에 내려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다섯 설교에 공통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방향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위에서 아래이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다른 모든 이야기와 다른 점입니다. 종교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신에게 올라가는 이야기이지만, 복음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따 온 열매나 얻은 떡이 아니라, 우리에게 내려와 주신 떡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올라가려고 애쓰는 대신, 내려오시는 분을 잘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것, 그 내려온 것을 우리도 누군가에게 흘려보내고 내려보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예로 들며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아브라함이 흉년이 들어 그랄 땅으로 갑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로 흉년이 들어 그랄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 지역의 왕 아비멜렉이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너를 보니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시는구나." 이방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룻은 어떻습니까? 나오미가 "너희는 이 땅에서 살아라" 할 때에 룻은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들어갈 때, 그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만나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너희의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고, 기적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이시다." 여리고성의 이방 여인이 정탐꾼들에게 그렇게 고백합니다.

여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늘 문이 열린 자리에 서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늘 문이 열린 자리에 서서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아직 닫혀 있는 땅의 사람들이 보고 그 닫혀 있던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그 복음이 세상으로 흘러가 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곧 하늘이 열리면 우리를 통해 그 세상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린 하늘 자리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올라가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 주님은 언제나 내려오고 계셨음을 기억합니다. 요단강에서 갈라진 하늘이 오순절에 우리 각 사람 위에 임하였고, 예수님이 받으신 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것을 우리 안에만 두지 말게 하시고, 우리도 누군가에게 내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눈물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눈물이 반드시 있다는 소망을 주시고, 우리가 포기한 자리까지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손이 닿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적용

  • 1응답이 없어 보이는 시간을 실패로 계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십오 년도, 말라기 이후 사백 년도 채우고 계셨습니다. 내 소원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멈추신 적은 없습니다.
  • 2기도를 하늘을 여는 지렛대로 여기지 말고, 이미 열린 하늘 아래 서 있는 자세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담대해진 다음에 전하겠다고 미루지 말고, 겁이 남아 있는 그대로 이번 주 한 사람에게 입을 여십시오. 말할 힘은 그 자리에서 주어집니다.
  • 3예배당에 하나님을 두고 나가지 마십시오. 걸어 다니는 성전으로서 직장과 가정과 학교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보이게 하십시오. 아비멜렉이 이삭을 보고, 룻이 나오미를 보고 하나님을 알아본 것처럼, 오늘 누군가는 여러분을 보고 하늘을 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올라가려 애쓰는 동안 주님은 언제나 내려오고 계셨음을 기억합니다. 요단강에서 갈라진 하늘이 오순절에 우리 각 사람 위에 임하였고, 아들이 아버지께 받으신 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에 아무도 취소할 수 없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이제 받은 것을 우리 안에만 가두지 말게 하시고, 우리도 누군가에게 내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걸어 다니는 성전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겁 많은 우리의 입술을 그 자리에서 열어 주시옵소서. 지금 눈물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눈물이 반드시 있다는 소망을 주시고, 우리가 이미 포기한 자리에까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손이 닿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열린 하늘 아래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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