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통해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고린도는 원래 주전 146년 로마 장군 뭄미우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던 도시입니다. 그러나 주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폐허를 로마의 식민지로 다시 건설하고 재건했습니다. 다시 세워진 고린도에는 해방 노예와 이주민과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정 수도가 될 만큼 번성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도시가 물질적 번영과 함께 극심한 신분 경쟁, 웅변술과 수사학에 대한 열광, 누가 더 지혜로운가를 겨루는 문화와 함께 커진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그런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글로에의 집 사람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 이 도시의 경쟁 문화가 교회에까지 스며들어, 신자들이 좋아하는 설교자를 중심으로 파벌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런 경쟁 의식 때문에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와 모임을 갖는 식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러한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합니까? 왜 이렇게 분열되었는지, 그리고 그 분열을 막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다수결 투표나 구조 조정, 조직 개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교회의 일치는 인간의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이 질문의 답은 다 "아니요"로 정해져 있습니다. 세례는 바울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바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이 질문을 통해, 사람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놓는 우상숭배적 태도를 정면으로 지적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된 저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인정하는 사람을 우상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꼭 하늘의 신이나 산, 바다, 나무, 짐승 같은 형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생각이 가장 많이 가는 것, 그것을 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어떤 목회자나 설교가나 달변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많이 내 속에 품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라고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열의 뿌리가 "지혜에 대한 세상의 기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웅변가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활동하며, 화려한 웅변과 수사학적 기교를 뽐내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설교자를 그의 언변이나 지혜로움으로 평가했습니다. "게바가 더 달변이고, 아볼로가 더 지혜가 있고, 바울이 율법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진 변증가더라." 이렇게 그들은 말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빼놓고, 표현과 설득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떠받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상적 지혜의 기준 자체를 뒤집어 놓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19절에 이사야 29장 14절을 인용하여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 세계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잔혹한 처형 도구였습니다. 자칭 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선포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어리석어 보이는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지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그 생각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탑을 높이 쌓아 올라가면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란하게 하셔서 그 탑을 중지시키고 민족을 흩으셨습니다. 오늘 고린도 교인들이 분쟁하고 나뉘는 것은, 첫째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고, 둘째 그들의 말의 지혜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실패한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전혀 다른 방식, 사람이 볼 때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절). 이것은 언어적 논리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셔야만 십자가의 도를 영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의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도전이 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세상의 성공 기준, 곧 규모와 영향력과 세련됨으로 평가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화려한 웅변이나 인간적인 매력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곧 세상이 보기에 가장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감추어져 있음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본문에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기록합니다. 고린도 도시 밖의 사람들이 오히려 문벌도 좋고 지혜로운 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부자도, 학벌 좋은 사람도 없는 이 작은 교회 안에서 분열과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 서로 잘났다고 다투다 분쟁이 났다면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별 볼 일 없는 사람들끼리 세상의 것을 본받아 이 작은 교회 안에서 싸우고 있느냐,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문벌 없고 능력 없고 지혜롭지 아니한 자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절). 하나님이 낮고 천한 자를 부르신 것은,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혜롭고 강하고 문벌 좋은 자들만 부르셨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근거로 구원을 자랑할 여지가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가능성을 차단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문벌도, 학식도, 능력도, 지혜도 없지만, 너희에게 있는 것이 있다.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지혜가 없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지혜를, 의롭지 못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거룩하지 못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구원받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원함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에 품고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지혜가 있고 의로움이 있고 거룩함이 있고 구원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레미야 9장 23-24절을 인용하여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여호와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것,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내가 따르는 지도자를 자랑하거나 나의 신앙적 성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외모입니까? 건강입니까? 지혜입니까? 학벌과 재산입니까? 내가 추종하고 좋아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나의 신앙과 우리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특정한 설교자나 신학적 유행이나 세상적 성공의 기준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것도, 구원을 이루는 지혜와 능력도, 우리가 자랑할 유일한 근거도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첫째 사람을 중심으로 나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모이는 것, 둘째 세상의 지혜와 성공의 기준으로 신앙과 교회를 평가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역설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 마지막으로 나의 자격이나 성취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부름받아 나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있음을 확실히 믿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이 말씀이 우리 각자의 삶과 우리 신앙 공동체 위에 온전히 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의 신앙과 우리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나의 신앙의 중심에, 우리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 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우리가 자랑할 것은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도임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