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강해 · 2026.09.02

소송과 신분

고린도전서 6:1-11 · 고린도전서 강해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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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린도전서 6장 1절부터 11절에 있는 말씀을 통하여 "소송과 신분"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간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계속 고린도전서를 보고 있는데,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한마디로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주전 44년에 다시 세운 식민 도시로, 로마의 법이 그대로 들어와 있었고, 도시 광장 한편에는 재판이 열리는 단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사도 바울이 총독 갈리오 앞에 끌려 나갔던 그 재판정의 자리가 고린도에도 있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법정은 단지 시비를 가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드는 장소였습니다. 그 시절 최고의 학문은 수사학이었는데, 수사학은 말싸움을 해서 말로 이기는 기술이고, 그 기술이 자란 곳이 바로 법정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사람들에게 소송은 권리를 지키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 보여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거기서 이긴 사람은 칭송을 받고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바로 그런 도시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성도를 고발하는 사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세 가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잊었습니다. 바울은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시작합니다. "구태여"는 "감히 그런 짓을 하느냐"로 읽힙니다. 7절의 "속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재물이나 재산에 얽힌 문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시대 로마 법정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신분이 높고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고발한 쪽이 교회 안에서 힘 있는 사람, 끌려간 쪽이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다툼이 아니라, 힘 있는 형제가 힘없는 형제를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운동장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때 성도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신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 바울은 그 다툼을 "지극히 작은 일", 곧 "지극히 작은 법정"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날 세상을 판단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가장 작은 재판소 하나 꾸릴 능력이 없느냐고 꾸짖는 것입니다. 지혜를 그렇게 자랑하던 고린도 교회에, 다투는 형제를 판단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 앞에 줄을 서 있습니다. 너희의 신분이 무엇인지 잊었다는 말입니다.

둘째,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졌습니다. 7-8절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다"고 합니다. "뚜렷한 허물"은 패배, 손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이미"가 있습니다. 재판이 시작도 하기 전에, 판결이 나기도 전에, 바울은 "너희는 이미 졌다"고 합니다. 고발한 사람도 졌고 고발당한 사람도 졌습니다. 소송을 시작하는 그 순간 두 사람은 다 진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기는 싸움이란 없습니다. 이겨도 형제를 잃고, 져도 형제를 잃습니다. 옳다는 소리를 듣고 나면 그다음에 남는 것은 "옳은 것"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잃습니다. 방송이나 소식을 통해 교회가 다투고 분쟁하는 일을 볼 때, 이긴 자는 결과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세상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이기고도 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법정에 가면 안 되는 것입니까? 바울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사용해 가이사에게 상고했습니다. 로마서 13장은 나라의 사법 권세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폭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긴 사람에게 무조건 "너는 성도니까 참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겨냥하는 것은 형제와 형제 사이의 일, 사적인 이해가 걸린 문제, 교회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데도 굳이 세상 사람들 보는 앞으로 들고 나가 서로 헐뜯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합니다. 손해를 보라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의 순서를 보십시오. 바울은 손해를 말하기 전에 먼저 신분을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을 판단할 사람이다."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은 결코 지려 하지 않지만,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져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어떤 가치로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진 것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한 가지만 져 보십시오. 다투던 자리, 싸우던 자리에서,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한번 내려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신분이 바뀐 사람은 서는 자리가 바뀝니다. 9절부터 바울의 말투가 바뀝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며 목록을 말합니다 —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이 목록을 읽으면 흔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네"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목록을 꺼낸 자리가 어디입니까?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그 자리입니다. 8절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이 목록은 바깥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라, 형제를 법정에 끌고 간 그 손 —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목록입니다. 그래서 11절 첫 마디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과거형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과거를 들춰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너희가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죄의 목록이 무엇이 되었습니까? 과거가 되었습니다. 무엇으로? 씻음도 받았고, 거룩함도 받았고, 의롭다 하심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은 죄의 목록을 대치합니다. 너희는 지금 씻는 중이 아니라 이미 씻겼고, 거룩해지려고 힘쓰는 중이 아니라 이미 거룩해졌고, 의롭다는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 아니라 이미 의로움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법정에 가서 "내가 옳다"는 판결문을 받아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가 그 판결문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 세상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람의 입이 아니라 성령으로, 내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미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왜 판결문을 받으러 다닙니까? 이미 씻긴 사람이 자기가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다시 진흙탕으로 들어갑니까?

신분이 바뀐 사람은 서는 자리도 바뀝니다. 우리는 증명하러 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의롭다고 증명하지 마십시오. 이미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거룩하다고 증명해 보이지 마십시오. 이미 거룩함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씻김, 곧 세례는 물이 해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셨고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너희가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바울의 선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감사합니다"뿐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이 모든 말씀의 주인이신 분은 정작 자신의 재판 자리에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도, 헤롯 앞에서도, 대제사장 앞에서도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했고, 베드로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실 그분이 피고석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그 피고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우리 대신 완전히 손해를 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죄는 우리가 따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미 씻긴 사람들입니다. 이미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이미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한 번쯤 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꼭 이기려는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아무 변명하지 않으셨기에 한 번쯤 져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씻기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늘 옳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였고, 그러다가 형제를 잃은 것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이기려는 마음보다 형제를 먼저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손해가 눈앞에 보일 때에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시고 우리 자리에 서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늘의 적용

  • 1지금 "이겨야 하는" 다툼이 하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이번 한 번은 져 봅니다 —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 2판결문을 받으러 다니는 마음(옳다는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 위에 섭니다.
  • 3형제와의 문제를 세상 앞에 들고 나가기 전에, 교회 안에서 지혜롭게 판단해 줄 통로를 먼저 찾습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씻기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늘 옳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다가 형제를 잃은 것을 고백합니다. 이기려는 마음보다 형제를 먼저 보게 하시고, 손해가 눈앞에 보일 때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시고 우리 자리에 서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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