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는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도시였습니다. 주전 44년 로마가 다시 세운 식민 도시로 법정이 광장 한복판에 있었고, 소송은 시비를 가리는 자리이면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드는 무대였습니다. 그 시대 최고의 학문인 수사학은 법정에서 말로 이기는 기술이었고, 이긴 자는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사람에게 소송은 권리를 지키는 수단이자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도시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성도를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너희가 누구인가"의 문제로 다룹니다.
바울은 "구태여(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느냐"고 시작합니다. 당시 로마 법정은 신분이 높고 형편이 넉넉한 사람에게 유리했으니, 이것은 대등한 다툼이 아니라 힘 있는 형제가 힘없는 형제를 자기가 이길 운동장으로 끌고 간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천사를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며, 그 다툼을 "지극히 작은 일(작은 법정)"이라 부릅니다. 마지막 날 세상을 판단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가장 작은 재판소 하나 꾸릴 지혜가 없느냐는 꾸짖음입니다.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 세상 앞에 줄을 서 있습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이미 뚜렷한 허물(패배·손실)이 있다"(7절). 앞에 붙은 "이미"가 핵심입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발한 쪽도 고발당한 쪽도 이미 졌습니다. 교회에서 이기는 싸움은 없습니다 — 이겨도 형제를 잃고 져도 형제를 잃습니다. 다만 바울은 국가의 사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그 자신이 가이사에게 상고했고, 롬 13장은 사법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 합니다). 겨냥하는 것은 형제와 형제 사이,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사적 이해의 문제를 굳이 세상 앞에 들고 나가는 일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라, 차라리 속으라." 손해를 말하기 전에 바울은 먼저 신분을 말합니다.
9-10절의 죄 목록(음행·우상숭배·간음·도적·탐욕·술취함·모욕·속여 빼앗음)은 바깥 세상의 명단이 아니라, 형제를 법정에 끌고 간 그 손 — 교회 안에 있던 목록입니다. 그런데 11절은 과거형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지금 씻는 중이 아니라 이미 씻겼고, 거룩해지려 힘쓰는 중이 아니라 이미 거룩해졌고,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 아니라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사람은 법정에서 "내가 옳다"는 판결문을 받아오려 했지만, 그 판결문은 이미 하나님의 법정에서 — 사람의 입이 아니라 성령으로, 내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주어졌습니다. 이미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판결문을 받으러 다니지 않습니다.
정작 이 말씀의 주인은 자신의 재판 자리에서 빌라도·헤롯·대제사장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이 우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죄는 우리가 따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값을 치르고 사 주신 것입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