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린도전서 6장 12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값으로 사신 몸」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이 수요 시간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마지막에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이야기하면서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것을 이어서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그 씻음은 어디까지 갔을까? 마음까지 갔을까, 아니면 몸까지 갔을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그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그들의 마음까지만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영혼은 귀하고 몸은 하찮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몸을 학대해야 거룩해진다고 하는 쪽도 있었습니다. 금욕이라든지 금기라든지 이런 것들을 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어차피 없어질 몸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쪽으로 이렇게 두 갈래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느 쪽을 선택하였느냐면 후자 쪽을 선택하였어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 어차피 없어질 몸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몸을 관리할 상품이나 즐길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 봅시다. 이 몸이 누구의 것이냐는 거예요. 사실 "이 몸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주제를 가지고 세 가지로 같이 은혜를 나누어 봅시다.
첫 번째는, 자유라는 말이 내 방패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사도 바울이 그대로 옮긴 것인데, 이 말의 뜻은 "여러분이 늘 하는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전부는 아닙니다"라고 하는 그런 뜻이에요.
사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쳐 준 진리에서 나왔어요. 너희가 율법에서 놓였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고 하는 그 말을 고린도 교인들이 많이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복된 복음의 진리를 받고 나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였다는 것을 얘기해요.
그런데 여기에 참 무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가장 거룩한 말을 골라서 쓴다는 거예요. 쉽게 얘기하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그 한 곳에 우리가 딱 꽂히게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온갖 이유와 온갖 방법과 온갖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여서 꼭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남자들이 어떤 장난감이나 차나 도구 같은 것이 필요할 때는 어떻습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온갖 이유를 다 갖다 붙여서 꼭 그것을 사고 싶어 하고 꼭 그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이 고린도 교인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들이 꼭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은혜라든지 자유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말을 갖다 붙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은혜, 자유, 사랑이 내가 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패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아,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는 방패로 막고, 또 누가 "그것은 안 됩니다, 잘못됐습니다" 하고 얘기하면 "아,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는 방패로 딱 막아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는 무엇을 합니까?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대로 한다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방패를 빼앗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말이 틀렸다고도 말하지 아니하였어요.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밀고 가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가하다. 그런데 그 자유가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고 있습니까?" 너희가 다 이런 방패로 막고 방패로 걸러 내면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 자유가 과연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고 있느냐고 사도 바울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2절 뒷부분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묘한 말이에요.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선택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그것이 나를 고르고 그것이 나를 주관한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를 처음 켜는 것은 누구입니까? 나예요. 처음에는 내가 주인이 되어서 그 핸드폰을 사용하는데, 어느 순간 밤이 되면 순서가 조용히 바뀌게 되죠. 다시 말하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해야 될지 내가 정하기도 전에 일단 무엇부터 듭니까? 핸드폰부터 들고 바라보게 돼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 때 이렇게 얘기를 해요. "이것은 나의 자유이다."
그런데 정말 자유로운 사람은 이렇게 자유를 자기가 변호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냥 안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 핸드폰을 안 하면 그것이 자유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이것이 내 자유다"라고 변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배와 몸은 그 무게가 다르다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라고 기록을 해요. 배가 고프면 먹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몸이 원하면 채우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과 배는 곧 없어진다는 거예요. 소화가 되고 나면 다 없어지고 만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라고 얘기를 합니다. 먹는 문제는 이 땅에서 쓰는 문제예요. 그러나 이 몸은 다르다고 사도 바울이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몸을 '소마'라는 뜻으로 쓰는데, 그 시대 사람들에게 몸은 벗어 버릴 옷이지만 성경에서 이 몸은 사람 그 자체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어요. 내가 있는 자리, 또 하나님 앞에 서는 방식이 바로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소마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몸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한창 몸이라든지 배라든지 그런 것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부활의 이야기로 그 내용을 바꾸고 있어요. 왜 부활의 내용으로 바꾸고 있느냐면, 이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육체는 하찮은 것이라고 해서 죽으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몸은 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몸은 벗어 던질 옷이 아니고 하찮은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몸을 무덤에서 다시 일으키신다고 얘기를 해 주고 있어요.
몸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종교는 많지만, 그러나 몸까지 건지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흙으로 간다고 하고, 또 몸과 육체가 분리되어서 영이 극락이나 열반으로 간다고 하는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결국에는 이 몸이 다시 부활하여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실 몸이라고 말씀을 해 주고 있어요.
사실 그렇다고 해서 몸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몸이 성한 사람이 더 거룩하고 아픈 사람이 덜 거룩한 그런 것은 아니에요. 병상에 계신 분의 몸이나 늙어 가는 몸도 똑같이 부활할 몸이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존귀한 이유는 몸이 잘나서, 튼튼해서,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몸을 지으시고 다시 살리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몸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력하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단계를 밟아 오면서 이 몸이 중요하다고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이 몸이 왜 중요하냐? 16절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창세기를 인용을 해요.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라고 기록을 해 주고 있어요. 여기서 "둘이 한 육체가 된다"고 하는 말은 창세기 2장 24절에서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둘이 한 육체를 이루었다고 하는 그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이 구절을 돈을 주고 사는 그 하룻밤의 자리에 그대로 가져다 붙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거룩한 단어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용하는 것이죠. 왜 그렇게 사용을 합니까? "너희가 그만큼 이 중요한 일을 하찮게 여긴다"고 사도 바울이 얘기해 주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 사람들은 하룻밤만 지나가면 없어진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 몸이 된다고 얘기를 해요. 15절, 16절, 17절에서 이 '한 몸이 된다'고 하는 말을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사용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 성이라고 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더러워서가 아니라 너무 깊어서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어요. 사람 둘을 통째로 붙여 버리는, 연합한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가볍게 만들려고 애쓰지만, 성경은 그것을 가볍게 지나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붙은 것은 떨어질 때마다 찢어진다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15절, 16절, 17절에 이렇게 붙어 있다고 얘기를 했잖아요. 그래서 17절에서는, 그러면 너희가 창녀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붙어 있어야 된다고 얘기를 해 주고 있어요. 창녀에게 붙으면 한 몸이 되지만, 우리가 주님과 붙어 있으면 한 영이 된다고 사도 바울이 얘기를 합니다. 왜 한 영이 되느냐? 그 연합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신 것이고,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한 영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디에 붙어 있는 자입니까? 무엇과 연합한 자입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 붙어 있고 한 영이 된 사람들이라고 얘기해 주고 있어요. 그것도 성령으로 붙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으로 붙어 있는데 이것을 떼어 내서 또 다른 어디에 다시 붙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얘기입니다.
세 번째로, 오늘 우리의 몸은 값이 치러진 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으로 붙어 있잖아요. 성령으로 붙어 있으면 이것을 우리가 지켜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18절에 "음행을 피하라"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한 번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어요.
옛날 교부들은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다른 죄는 싸워서 이길 수 있지만 이 음란의 죄는 도망쳐야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창세기의 요셉이 그렇지 아니하였습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옷을 붙들었을 때에 요셉은 그 아내를 설득하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냥 옷을 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했죠.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아무도 안 보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요셉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죄에서 지는 사람은 마지막에 "내가 이 죄를 범했구나, 죄를 지었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때부터 이미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음란의 죄는 이기려 하지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나오셔야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끔 자기 의지로 버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 자기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성경이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더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망칠 힘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함께 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어요. 우리도 같지 않습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도 그 위험의 자리에서, 그 유혹의 자리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미 11절에서 우리가 다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먼저 선언을 했어요. 그래서 이미 씻긴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은 정죄가 아니라 이미 씻기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된 이 몸을 너희가 잘 지키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9절과 20절에서 너희의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전'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고 있는데, 3장 16절에서는 교회 전체를 향하여 얘기하고 있고, 오늘 본문 6장 19절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시고 예배를 하는 곳입니다. 그 성전이 내 몸이라고 한다면, 예배는 이 예배당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내가 걸어 나가는 곳마다 바로 예배의 자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어요.
그리고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어쩌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요즘에는 그렇게 말하잖아요.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내가 알아서 산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이라고 요즘에는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른 분의 것이라고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 너희는 그 사신 분에게 속한 것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값으로 샀다'고 하는 말은 시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노예 시장에서 사람을 사는 그러한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보통 노예 시장에서는 주인만 바뀌고 자유는 없습니다.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내가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노예 시장에서는 주인만 바뀌지 그 노예는 그대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신 그 주인은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고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사셨다고 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우리는 그 사신 분에게 팔려 갔지만 오히려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산 값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얼마에 샀는지 말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얘기해 주고 있어요. 베드로는 은이나 금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이 얼마짜리인지 알고 싶은 분은 어떻게 하시면 되느냐 하면, 시장에 나가 보시는 것이 아니라 갈보리 언덕을 바라보시면 과연 내 몸이 얼마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얘기를 합니다. 마지막 명령이죠. 우리가 순서를 생각해 보면 먼저 명령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즉'이라는 그 말 앞에 선언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로 값이 치러져서 사신 바 되었다고 하는 선언이 나오고, 그다음에 명령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그런즉'이라고 하는 말이 오면서 우리 몸을 거룩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것이 되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몸을 지켜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고 하는 이 말은 어떤 의미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러 주셨으니 이제 너희가 너희의 몸을 그 위에 거룩하게 세워야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값을 치러서 세우셨으니, 너희가 거룩해져서 그 치른 값 위에 이 거룩함을 세워 나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성전이라고 하는 말,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 번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자기 몸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뒤엎으셨을 때에 사람들이 무슨 권한으로 이러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셨어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사람들은 돌로 지은 건물을 생각했지만, 그러나 요한은 이것을 그대로 적어 두었습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장에 이렇게 기록을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기 몸을 성전이라고 부르신 그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헐리도록 내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입고 오셔서 배고파도 하시고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몸이 채찍에 찢기고 못에 박혔다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그 몸을 가지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이 하찮다고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몸으로 우리를 위해서 값을 치르시고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몸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 그 성전 하나가 헐림으로 인하여 새로운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한마디를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값으로 치러진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값을 치른 몸이다. 그러므로 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시면서 남은 한 주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몸까지 사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썼고, 함부로 쓰면서 자유라고 우리가 불렀는데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피할 힘을 주시옵소서. 싸워 이기려다가 넘어지지 않게 해 주시고, 그 자리에서 먼저 걸어 나오게 할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자기의 몸을 성전이라 부르시고 그 성전을 내어 주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