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본문은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11절)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묻습니다. 그 씻음은 어디까지 갔는가. 마음까지인가, 몸까지인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몸은 언젠가 벗어 버릴 껍데기였습니다. 영혼은 귀하고 몸은 하찮다는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져 나왔습니다. 한쪽은 몸을 학대해야 거룩해진다며 금욕과 금기로 갔고, 다른 한쪽은 어차피 없어질 몸이니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쪽으로 갔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 위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복음의 언어를 덧입혔습니다.
바울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을 끝까지 밀고 가서, 자유가 실제로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몸의 소유권을 밝히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 몸은 누구의 것인가. 본문은 명령으로 시작하지 않고 선언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서야 "그런즉"이라는 말과 함께 명령을 놓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12절). 앞부분은 고린도 교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고, 바울은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전부는 아니다 —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무서운 습성이 하나 드러납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가장 거룩한 말을 골라 씁니다. 하고 싶은 것 한 곳에 마음이 꽂히면 온갖 이유와 온갖 좋은 말을 다 끌어다 붙입니다. 은혜, 자유, 사랑 — 가장 복된 단어들이 그렇게 방패가 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건 은혜지요" 하고 막고, "그건 잘못입니다" 하면 "사랑으로 봐야지요" 하고 막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자기가 하고 싶던 것을 그대로 합니다.
바울은 그 방패를 빼앗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12절 하)고 덧붙입니다. 자유란 묘한 것이어서,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고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나를 고릅니다. 휴대전화를 처음 켜는 것은 나입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순서가 조용히 바뀝니다. 무엇을 볼지 정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그것을 듭니다. 그때도 우리는 "이건 내 자유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 자유를 변호하지 않습니다. 안 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배와 몸의 무게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 다 폐하십니다(13절). 먹는 문제는 이 땅에서 쓰고 사라지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몸은 다릅니다. 바울이 쓰는 '몸'(소마)은 벗어 버릴 옷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 내가 서 있는 자리이며 하나님 앞에 서는 방식입니다.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몸과 배를 말하던 바울이 14절에서 갑자기 부활로 넘어갑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육체란 썩어 없어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몸을 폐하지 않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일으키십니다. 몸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 부르는 종교는 많지만, 몸까지 건지는 것은 성경뿐입니다.
그렇다고 몸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몸이 성한 사람이 더 거룩하고 아픈 사람이 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병상에 계신 분의 몸도, 늙어 가는 몸도 똑같이 부활할 몸입니다. 몸이 존귀한 이유는 잘나서, 튼튼해서,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몸을 지으셨고 다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몸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5절). 바울은 16절에서 창세기 2장 24절, 곧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두고 하신 "둘이 한 육체가 된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구절을 돈을 주고 사는 하룻밤의 자리에 그대로 가져다 붙입니다. 너희가 그만큼 중요한 것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사람은 하룻밤 지나면 없어진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이 성(性)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 것은 그것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사람 둘을 통째로 붙여 버리는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자꾸 가볍게 만들려 하지만, 붙은 것은 떨어질 때마다 찢어집니다.
그리고 17절이 옵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창녀에게 붙으면 한 몸이 되지만 주님께 붙으면 한 영이 됩니다. 그 연합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신 것이고,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갑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떼어 내어 다른 데 다시 붙일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붙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18절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여기서 '피하라'는 한 번 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다른 죄는 맞서 싸워 이기지만 음란의 죄는 도망쳐야 이긴다고 말해 왔습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옷을 붙들었을 때 요셉은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고백입니다. 죄에 지는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야 "내가 죄를 지었구나" 하지만, 실은 그 자리에 남아 있기로 한 그때 이미 넘어진 것입니다.
다만 도망칠 힘이 우리 의지에서 나온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요셉에 대해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강했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창 39:2, 21). 피할 힘은 사람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도 그 유혹의 자리에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정죄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11절에서 우리가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미 씻긴 몸, 이미 거룩해진 몸을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19절과 20절이 그 근거를 놓습니다. "너희 몸은 …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바울은 '성령의 전'이라는 말을 두 번 씁니다. 3장 16절에서는 교회 전체를 향해, 오늘 6장 19절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씁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고 예배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그 성전이 내 몸이라면 예배는 예배당에서 끝나지 않고 내가 걸어 나가는 곳마다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일지 모릅니다.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는 것이 시대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너희는 값을 치르신 분의 것이다. '값으로 샀다'는 말은 노예 시장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노예 시장에서는 주인만 바뀌고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를 사신 주인은 우리를 부리려고 사신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사셨습니다. 팔려 갔는데 오히려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값이 얼마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대신 말합니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벧전 1:18-19). 내 몸값이 궁금한 사람은 시장에 나가 볼 것이 아니라 갈보리 언덕을 보면 됩니다.
순서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런즉"이라는 말 앞에 선언이 먼저 있습니다. 너희는 이미 값으로 산 바 되었다는 선언이 놓이고, 그 위에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이 옵니다. 하나님이 이미 값을 치러 세워 주신 그 터 위에 거룩함을 세워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자기 몸을 성전이라 부르신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뒤엎으셨을 때 사람들이 무슨 권한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사람들은 돌로 지은 건물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몸을 성전이라 부르신 그분이 그 성전을 헐리도록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입고 오셔서 배고파하시고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몸이 채찍에 찢기고 못에 박혔다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그 몸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니 몸이 하찮다는 말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성전 하나가 헐림으로 새로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