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창세기 44장에서 유다는 아우를 대신해 종이 되겠다고 자기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푼 것은 유다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마침내 자기를 드러내면서 그 자리가 풀립니다.
1절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구덩이에 던져진 지 스물두 해, 애굽을 다스려 온 사람이 오늘 아침에는 관리들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 울음이 애굽 온 집에 들렸습니다. 오래 눌러 두었던 것이 터진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두 마디 위에 서 있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리고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3절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형들은 얼어붙었습니다. 자기들이 판 그 아우가 애굽의 총리로 서 있으니, 그 자리는 가시방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다시 말합니다. 4절입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아버지의 편애와 형들의 시기로 벌어진 그 거리가 구덩이가 되고 애굽으로 팔려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 거리를 없앤 것은 형들의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손해를 본 쪽이, 맞은 쪽이 먼저 불렀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그런데 요셉은 양식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곳간이 아니라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후손을 하나님이 지키고 계셨던 것이고, 그 후손의 끝에서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그래서 8절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형들에게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형들이 저지른 악행은 그대로 악행입니다. 죄는 온전히 형들에게서 나왔고, 하나님은 그 죄까지도 자기의 선하신 목적으로 다스리셨습니다. 요셉이 뒤에 다시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둘 다 참입니다. 둘 다 참이기 때문에 이것이 위로가 됩니다.
요셉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14절과 15절,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고 모든 형제와 입을 맞추며 우니 그제야 형들이 비로소 그와 말하였습니다. 말이 눈물보다 늦게 온 것입니다. 이어지는 24절에서 요셉은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 형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화해했다고 서로 탓할 거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까지 아는 것이 참된 화해입니다.
이 장면은 부활하신 주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곁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숨긴 채 걸으시다가, 떡을 떼실 때에야 그들의 눈을 밝혀 자기를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숨어 계시던 분이 스스로 드러내실 때에야 알아보게 되는 같은 자리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십자가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의 죄이고,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