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다 강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명령 속에서 레위 가족의 한 여인이 사내아이를 낳습니다. 석 달을 몰래 키우다가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를 만들어 나일 강에 숨깁니다. 그때 바로의 딸이 상자 속 아이를 보고 자기 아들로 삼습니다. 그 이름을 모세라 짓는데, 물에서 건져 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모세가 왕궁에서 자란 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동족에게 거절당하여 미디안 광야로 피합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데까지 본문이 이어집니다.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장성하여 밖에 나가 보니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여기서 모세의 행동을 칭찬하지도 않고, 그의 혈기를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모세가 좌우를 살폈다고 기록합니다. 모세는 동족 히브리 사람을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좌우만을 살폈습니다.
다음 날 모세는 히브리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봅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였습니다. 구원하려던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바로의 눈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가고, 그곳에서 결혼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바로 왕이 죽었습니다. 왕이 죽었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더 심해지니 백성은 더 탄식하고 더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절부터 22절까지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23절부터 25절까지에는 하나님이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시고,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이 간절하게 부르짖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고 시작하신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1절부터 22절까지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가만히 쉬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상자를 만든 어머니의 손에서도, 멀리 서서 지켜보던 누이의 눈길에서도, 아이를 건져 올린 바로의 딸의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셨습니다. 응답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눈이 어두워 깨닫지 못할 뿐, 하나님께서는 멈춘 적이 없으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훗날 이 장면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거절당하여 광야로 밀려난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다시 보내셨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절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절당하여 죽으신 그 자리에서 오히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붙드는 것은 우리 손의 열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