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4장은 고발로 시작합니다. "너희가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이스라엘의 목자들, 곧 백성을 맡은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그런데 이 장은 고발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중심은 "누가 잘못했느냐"라는 비난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입니다. 목자들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그것을 붙들고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에스겔이 고발한 목자들과 정반대 자리에 서신 분이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선한 목자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부탁을 받은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에서 양을 치는 자의 자세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구약의 고발, 하나님의 약속, 그리스도의 성취, 사도의 권면이 한 줄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지금 나를 먹이고 있는지, 맡겨진 양을 먹이고 있는지 오늘 본문이 묻습니다.
하나님은 2절에서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는 분명 진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에서는 "슬프다"라는 탄식으로도 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진노하시면서, 동시에 사명을 저버린 목자들과 흩어진 양들을 향해 슬퍼하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혼낼 때 화를 내면서도 그 속에 자녀가 제대로 살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자리에서 우리가 웃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슬퍼하시면 자녀도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양의 고백처럼, 아버지께서 슬퍼하시는 곳에 우리의 눈물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슬퍼하셨습니까. 목자는 양을 먹이는 자입니다. 원어에서 "목자"라는 말과 "먹인다"라는 말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목자라는 이름 자체가 곧 먹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이고" 있었습니다. 직분의 이름은 가졌으나 직분의 일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3절과 4절은 목자들의 죄를 두 방향에서 말합니다. 3절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죄입니다.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고 그 털을 입었습니다. 사무엘상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꼭 그러했습니다. 백성이 제물을 가져오면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좋은 것을 먼저 취해 자기들이 먹었고, 결국 두 사람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기고 함께 죽었습니다. 양을 배부르게 해야 할 자들이 자기만 배부르게 하고 양을 잡아먹은 것입니다.
4절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아니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섯 가지 모두 그 대상이 약한 자들입니다. 힘 있는 자가 연약한 자를 돌보지 않은 것, 하나님은 이것을 "포악"이라 부르십니다. 포악이란 자신이 가진 힘과 권세로 연약한 자를 도와야 하는데 도리어 그 힘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5절입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도다." 양은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어서, 무리에서 낙오된 양은 스스로 무리를 따라잡지 못합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곧 사형선고입니다. 그런데 6절이 더 무겁습니다. 양이 다 흩어진 그 상황에서, 찾으러 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목자라는 이름과 직분을 가진 사람은 많았지만,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는 목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도 중요하지만, 본문이 더 무겁게 묻는 것은 그 양을 찾으러 가는 사람이 있느냐입니다.
목자들이 자기 배만 불리고 아무도 찾지 않을 때, 누가 일어서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목자들을 대적하시는 목적은 목자를 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라 하시고, 15절에서는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6절에서 4절의 다섯 가지를 하나님이 친히 뒤집으십니다. 잃어버린 자는 찾으시고, 쫓기는 자는 돌아오게 하시고, 상한 자는 싸매 주시고, 병든 자는 강하게 하십니다. 목자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나님이 친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일은 목자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직분과 사명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인데 그들이 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친히 나서십니다. 이것은 목회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맡겨진 직분이 있습니다. 그 직분에 맞는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실패로 멈추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우리가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이 약속이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에스겔 34장을 배경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고발한 목자들은 양을 잡아 자기가 먹었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를 내어 주어 양을 살립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친히 찾으리라" 하신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잃어버린 양인 우리를 찾기 위해 목자가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 선한 목자에게 직접 양을 부탁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21장,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아침을 준비해 두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자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양을 치는 자의 자세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본이 되는 자세로. 에스겔 34장의 목자들이 정확히 그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이득을 위해 양을 잡았고, 힘으로 양을 지배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길을 걷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4절입니다.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이것은 보상을 얻기 위해 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섬김을 판단하고 평가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총회도 아니고, 여론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아닙니다. 목자장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님이 보고 계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수고한 사람을 예수님이 기억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겔 34장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질문입니다. 나는 지금 나를 먹이고 있는가, 아니면 나에게 맡겨진 사람을 먹이고 있는가. 나만 배부르려 하고 나만 채우려 하는가, 아니면 맡겨진 일과 맡겨진 사람을 위해 나누고 섬기고 있는가. 다른 하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실패한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셔서 친히 채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찾는 사람이 없던 그곳에 예수님이 오셔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친히 불러 주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셨고, 이제 그분이 우리가 따라갈 본이 되십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