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값을 주고 사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7장은 그 몸을 가지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어서 말해 줍니다. 곧 결혼과 이혼, 그리고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결혼, 이 세 가지입니다.
다음 주면 추석입니다. 요즘은 나이가 든 남자나 여자가 고향 집에 가는 것을 꺼립니다.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느냐"는 말 때문에 가족 만나는 일이 부담이 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분위기입니다. 결혼은 늦어지고 이혼은 흔해졌으며, 한쪽만 믿는 가정도 교회 안에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도 바울의 대답은 셋으로 나뉘지만 결국 하나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것도 흠이 아니고, 결혼해서 사는 것도 흠이 아니며, 믿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도 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서 바울은 우리가 늘 생각해 온 방향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부정한 것이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이 더 힘이 셉니다.
바울은 혼자 사는 것도, 결혼해서 사는 것도 각각 은사라고 말합니다. 여기 쓰인 '은사'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 쓰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그가 받은 은사대로 사는 것이고, 결혼한 사람도 그가 받은 은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신으로 사는 것이 미완성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혼한 사람은 더 좋은 성적표를 받은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혼자 사는 것도 좋은 것이고, 결혼해서 사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다만 자기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결혼하는 편이 유익하다고 바울은 덧붙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에게는 분명한 말을 합니다.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합니다. 6장에서 들은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는 말씀의 결혼판인 셈입니다. 결혼 안에서 내 몸은 배우자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혼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6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하는 말이 명령이 아니라 권하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 와서는 어조가 달라집니다.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못을 박습니다. 결혼하지 않았거나 배우자를 잃은 사람은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고, 이미 결혼한 부부에게는 갈라서지 말라고 합니다.
11절은 이혼해도 좋다고 허락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갈라선 경우를 두고, 그대로 지내든지 아니면 다시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 하는 규정입니다. 그러니 본문이 우리에게 먼저 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화합할 방법을 힘써 찾으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다시 함께할 길을 모색해서, 서로 헤어지지 않고 나뉘지 않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본문의 배경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갈라서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 안에서 분쟁과 다툼이 생긴 경우입니다.
요즘은 이혼이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구독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해지하듯, 결혼과 이혼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고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가능하면 헤어지지 말고 그 자리에 머물러 화평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생각이나 사회 분위기나 현실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만 성경이 무조건 붙들고만 있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15절은 믿지 아니하는 상대가 갈라서겠다고 하면 갈라서게 두라고, 그런 일에 억지로 얽매일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화평 중에서 부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티고 견디는 것이 언제나 거룩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부정한 것이 거룩한 것을 더럽힌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좋은 말보다 나쁜 말을 더 빨리 배우듯, 부정한 것은 빠르게 번지고 깨끗한 것이 옮아가는 일은 더디고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배우자도 믿는 사람을 구하려 하고,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 내 거룩이 옮아가기보다 그 사람의 세상적인 것이 내게 옮아올까 두려워 그런 만남을 꺼립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꼭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 바울은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믿는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이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룩한 것이 더 힘이 셉니다. 우리는 부정한 것에 오염될까 봐 경계하고 두려워하지만, 바울은 부정한 것을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합니다. 내게 있는 거룩함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히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가정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대고 계신 자리라는 뜻입니다. 구원하시는 일은 여전히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16절은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고 말합니다. 눈여겨보십시오. 바울은 네가 반드시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찌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왜 아직도 안 믿느냐고 조급해할 것도 없고, 내가 부족해서 배우자가 믿지 않는다고 자책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좋은 아내가 "나는 예수를 믿어 거룩하니 당신과 살 수 없습니다" 하며 갈라서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신앙이 좋은 남편이 "너는 교회도 안 다니지 않느냐" 하며 아내를 매몰차게 밀어내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 그런 집이 있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디모데의 집입니다. 어머니는 유니게, 외조모는 로이스였습니다. 유대인의 관습대로라면 유대인끼리 결혼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지만, 유니게는 헬라 사람, 곧 이방 남자와 결혼하여 디모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믿음이 아들에게로 흘러갔습니다. 외조모 로이스에게서 어머니 유니게에게로, 유니게에게서 디모데에게로 이어져, 결국 디모데가 바울의 뒤를 잇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에게 나병환자는 함께 살 수 없는 사람, 성 밖과 진영 밖으로 쫓겨난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벤허'에도 나병에 걸린 어머니와 누이가 마을 밖 동굴에 격리되어 사는 장면이 나오지요. 아무도 그들을 만지지 않았고 가까이 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정한 병이 자기에게 옮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에게 다가가 손을 대셨고, 그 사람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거룩함과 능력이 부정한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배우자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셔서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내 힘으로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나와 함께하여 나를 통해 그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간혹 부부가 서로를 향해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마라 하며 자기 노력으로 상대를 바꾸려 애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상대를 바꾸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가와 물을 때 막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그에게로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아들을 세상 한복판, 바로 우리 옆자리에 두셨습니다. 부정한 것이 옮을까 두려워해야 한다면 우리는 산속에 들어가 격리되어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세상 한가운데 두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고, 그 거룩한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내가 먼저 보여 주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