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고린도전서 7장 16절에서 우리는, 배우자를 구원할지는 알 수 없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한 줄로 묶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부르신 그 모습 그대로 순종하라는 것이고, 이 명령은 24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로 마무리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꾸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겉모습부터 바꾸어야 하고, 무언가를 더 갖추어야 하나님 앞에 떳떳해진다고 여깁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 생각이 결혼 문제로 드러났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를 떠나야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겉의 표나 처지를 바꾸어야 더 나은 신자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러지 말고, 부르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보이려고 누구나 아는 예인 할례와 종의 신분을 차례로 가져오면서 바울은 17절과 20절과 24절에서 같은 말을 거듭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거하라는 것입니다.
17절 끝에서 바울은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덧붙입니다. 한 사람에게 하는 개인적인 권면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뜻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할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인 교회라면 누구나 아는 문제였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완전해진다고 여길 수도 있고, 반대로 그 흔적을 지워야 새 출발을 한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겉모습을 바꾸어 부족한 신앙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은 사람은 받은 그대로, 받지 않은 사람은 받지 않은 그대로 있으라고 하면서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말합니다.
계명을 지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계명 안에서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효력이 없고,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며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새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몸에 새기거나 지우는 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흔적을 지워야 한다 하면서 그것으로 서로 다투고 판단하고 편을 나누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종과 자유인을 이야기합니다. 할례보다 어쩌면 더 큰 사회 문제였습니다. 로마 시대의 종은 단순히 일꾼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바울은 종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 기회를 쓰라고 합니다(이 구절을 '오히려 지금 처지를 쓰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22절에서 놀라운 역설을 말합니다.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께 속한 자유인이고,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신분이 낮다고 덜 자유로운 신자가 아니고, 직급이 높다고 더 자유로운 신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이미 받았습니다. 세상의 신분을 뒤엎어야 신앙이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정해진 근거는 23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6장에서도 들은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기에, 이제 우리는 세상이 매기는 신분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곧바로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직분을 가진 사람이, 혹은 나이 든 사람이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이나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봉사를 안 하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 직분을 맡아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과 권면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섬김과 순종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다만 성경이 요구하지 않는 기준을 믿음의 증명으로 내걸 때는 분별해야 합니다. 누군가 "믿음이 있으면 이렇게 해야지" 하면서 내 자리를 흔든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인지 사람의 명령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 없이 사람의 말을 따르면 값으로 사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다시 사람의 종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 17절, 20절, 24절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거하라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하고, 24절에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핵심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데 있습니다. 무할례자로 있어도, 할례자로 있어도, 종의 자리에 있어도, 자유인의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자리가 힘들면 피하고 싶고, 도망하고 싶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습니다. 목사에게는 목사의 자리가, 사모에게는 사모의 자리가, 부모에게는 부모의 자리가, 자녀에게는 자녀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기쁠 때도 있지만 고난의 자리가 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자리로 가면 편하겠지 싶어도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도 자유의 길이 열리면 쓰라고 했습니다. 자리를 바꾸어 하나님 앞에서 더 높아지려 하지 말고, 어느 자리에서든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가 힘들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 자리가 위로의 자리, 피난처가 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이 던진 구덩이도, 애굽의 감옥도 우리 눈에는 고통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기에 그 감옥이 보호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형편을 바꾸어 주시기 전에 먼저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값을 치러 자기 소유로 삼으신 자녀를 예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보호는 고난이 비켜 간다는 약속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게 붙드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함께하심은 6장에서 들은 대로, 우리를 성전 삼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오늘 이루어집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리를 바꾸는 것이 신앙을 높이고 하나님 앞에 더 신실해지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 자리를 옮겨 주십시오"에서 머물지 않고 "하나님, 이 자리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