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로 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말로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은 행동도 똑같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가느냐 하는 일상의 행동 하나로 옆 사람을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 7장에서 우리는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섬기는 길을 보았습니다. 8장은 그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과 어떻게 함께 나눌 것인가를 다룹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질문 가운데 세 번째가 이것이었습니다(7:1, 25 참조). 우상 앞에 드려진 제물을 먹어도 됩니까, 먹지 말아야 합니까.
당시 신전에서 제사에 쓰인 고기는 시장에서 팔렸고, 모임의 잔칫상에도, 가족 잔치에도 올랐습니다. 우상 제물이라고 다 거부하면 장을 보기도, 잔치에 가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먹어도 된다는 사람들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갈렸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에 먹느냐 마느냐보다 더 깊은 데서 답합니다. 내가 먹고 먹지 않는 행동이 내 옆의 형제를 세우느냐 무너뜨리느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지식은 그들의 자신감이었습니다. 그 지식을 인정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절). 교만하게 한다는 말은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린다는 뜻입니다.
지식은 풍선처럼 부풀리고, 사랑은 벽처럼 사람을 세웁니다. 풍선은 크게 부풀고 여러 개 모아 두면 보기에도 좋습니다. 작은 바늘 하나에 터져 버리는 것도 풍선입니다. 벽은 볼품이 없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이 등을 기댈 수 있는 것은 그 볼품없는 벽입니다. 자기만 부풀리고 자기만 만족하는 지식은 결국 헛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화려하지 않아도 누군가 와서 기댈 자리가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바라는 것은 더 큰 풍선이 아니라 더 든든한 벽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사랑입니다.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너를 알아 주신다, 하나님이 너를 기억하고 계신다, 그것이 너희에게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알아 주셨다는 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 갑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 지식이 교만으로 흐르면 머리로 아는 지식만 높아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얕을 수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부족하고 기도가 서툴 수 있습니다. 신앙이 얕다고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적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되고 더 큰 은혜가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지식을 헛것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만물이 그에게서 났으며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있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습니다(6절).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배운 이 지식은 옳고 귀합니다. 8절에서 바울은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음식보다, 친구와 대인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선순위가 마음에 정리되어 있으면 관계 때문에 신앙이 뒤로 밀리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자유하니까, 나는 권리가 있으니까, 시장에 나온 고기든 잔칫상에 오른 음식이든 먹어도 상관없다. 그 가운데 믿음이 약한 사람은 이것을 먹어도 되나 망설입니다. 그런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 먹으면,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9-10절).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지식이 모자란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공부를 다 마치지 못했다거나 기초만 배웠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아직 옛 생활과 옛 습관을 다 정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7절).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먹던 사람이, 믿고 나서 이건 먹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깁니다. 그때 믿음 있다는 사람이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 먹으면 옛날 그 맛과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멀리해야 할 옛 삶이 다시 가까워집니다. 그 믿음은 자라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바울은 지식 있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네가 먹어도 네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너에게 좋은 것이다. 네가 그 행동을 할 때 네 옆에 누가 서 있는지 돌아보아라. 말할 때 듣는 사람을 생각하듯 행동할 때도 옆 사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불편해하면 무조건 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약한 형제는 내 자유를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자기 양심을 거슬러 따라 하다가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8장 앞부분에서 「지식 있는 자」라고 부르던 바울이 뒤로 갈수록 「형제」라는 말을 거듭 씁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지식을 겨룰 상대가 아니라 내 형제입니다.
왜 그 형제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야 합니까. 1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옛 삶을 다 끊지 못했어도, 그를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피값으로 그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형제에게만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바울은 강하게 말합니다(12절).
교회 안에서 뛰어다니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는 혼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그 어린 영혼을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값을 치르셨습니다. 어른만, 헌금 많이 하는 사람만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사람이 아닙니다. 초신자라서, 지식이 없어서 가볍게 여겨도 되는 사람은 교회 안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식사를 마치신 뒤 대야를 가져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느냐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어떤 제자보다 지식이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지식이 있다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이 바라는 모습도 연약한 사람을 위해 무릎 꿇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11:1).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First Jesus, Second Others, Third You. 첫째는 예수님, 둘째는 이웃, 셋째가 나 자신입니다. 내가 지식이 있다고, 나에게 자유할 권리가 있다고 나부터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로 사신 연약한 형제, 이제 막 옛것에서 벗어나려는 그 형제를 세우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