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장 앞부분에서 바울은 자기에게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다 쓰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권리를 다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무엇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는 것까지 감수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씁니다. 직장이든 학교든 모임이든, 그곳의 규칙을 배우고 익힙니다. 내 것을 주장하기보다 그 모임의 규칙에 나를 맞춥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단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런 모습으로 자기 자유를 내려놓고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절에서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라고 했고, 19절에서도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버리고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
바울이 종이 된 것은 억지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고, 순종하며 낮아지는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만약 억지로 종이 되려 했다면 그것은 매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했기에 더 큰 열매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사명을 받았다, 직분을 받았다 할 때 억지로 하면 그것은 매임이 됩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여러 직분을 맡지만, 목회자도 사명을 억지로 감당하면 그것은 매임이요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면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운동이든 공부든 목표를 정해 놓고 할 때,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즐긴다는 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주의 일을 하고 사명과 직분을 감당할 때에도 억지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어디서 배웠을까요?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하늘에서 모든 것을 헤아리시는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으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억지로 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신 일이었기에 놀라운 결과를 맺었습니다. 우리도 주의 일을 매임이 아니라 자유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종이 되어 여러 사람을 대한 모습을 말합니다. 유대인, 율법 아래에 있는 자, 율법 없는 자, 약한 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구절들에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얻고자 함이라」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20절),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2절). 바울의 가장 큰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으로도 저런 모습으로도, 이런 환경에서도 저런 환경에서도 처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여러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했지만 마지막 목표는 복음으로 그들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시작은 여러 모양이었어도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 말씀으로 가르칩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을 보고 그 제단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너희가 섬기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이 있구나 하며 말문을 엽니다. 회당에서는 말씀으로, 아덴에서는 제단으로 시작했지만, 바울이 끝내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여러 환경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을 계기를 마련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서울에 올라가는 길이 경부고속도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호남고속도로도 있고 중부고속도로도 있고, 동해안으로 빙 돌아 양양고속도로로 갈 수도 있습니다. 갈래길은 여럿이지만 목표는 서울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여러 방법을 쓰고 여러 가르침을 주고 여러 환경에 처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증거하고 그 복음의 능력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한 가지 예를 듭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운동 경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전국체전 같은 경기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25절). 선수는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를 위해 절제합니다. 달리기 선수가 대회에서 1등을 하려고 절제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절제가 아니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절제입니다. 단지 밥을 굶고 힘든 것을 참아서 경기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있기에 절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제는 참는 힘이 아니라 목표가 있는 사람이 하는 거절입니다. 식단 조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밥을 굶고 참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밥을 먹지 않기로 거절하는 것, 그것이 절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절제의 힘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절제도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갈 5:23). 절제하고 거절할 수 있는 힘도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고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과 생각과 행동을 조절하고 인도하고 이끕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에 사로잡힌 자,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 늘 성령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자유도 권리도 내려놓고 종의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하고 연합했습니다. 때로는 핍박과 고통도 당했지만 한 사람을 얻기 위해 그렇게 했고, 그 목표 때문에 거절할 수 있었고 절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달려가는 경주에는 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그 경주의 끝에 누가 계신지 보여 줍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