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세기 29장 31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보시는 하나님, 찬송으로 돌아선 자리"라는 제목으로 새벽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새벽에 나오는 걸음 속에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마음이 하나둘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나는 여기서 늘 두 번째구나"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레아는 사랑받으려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계략에 떠밀려 결혼한 여인이었습니다. 시작부터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자리에 놓였고, 곁에는 늘 더 사랑받는 동생 라헬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29장은 흔히 라헬과 레아의 애정 다툼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장면의 한복판에 놓아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라는 31절입니다. 집안의 시선은 온통 라헬에게 있었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레아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 "보시고"는 그저 눈에 들어왔다는 말이 아니라, 사정을 살피시고 직접 손을 쓰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광야로 쫓겨난 하갈이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불렀던 그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 "사랑받지 못함"은 원문에서 "미움받는"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덜 사랑받는 아내의 처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까지 그 사랑받지 못한 아내의 아들의 권리를 지켜 주라고 명령하십니다(신 21:15 이하). 하나님은 미천한 자리를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시선은 같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7-28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라고 기록합니다. 은혜는 사람들의 선호를 따라 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선호에서 밀려난 자리에 은혜가 흘러갑니다.
둘째, 이름마다 새겨 놓은 그녀의 갈망입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그 이름에 자기 마음을 새겨 넣었습니다. 첫째 르우벤에게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둘째 시므온에게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셋째 레위에게는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읽다 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문장의 끝은 매번 남편에게로 돌아갑니다. "내가 남편에게 더 사랑받을 것이다. 내가 더 남편의 시선을 끌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사람의 사랑을 얻는 수단으로 쓰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응답을 받고도 마음은 결국 사람의 안정으로, 사람의 인정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셋을 낳도록 야곱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서 채우려는 갈증은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랑을 얻어 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메말라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셋째, 넷째 아들, 찬송으로 돌아선 자리입니다. 넷째를 낳고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름을 유다라 짓습니다. 남편의 이름이 사라지고 이제는 여호와의 이름만 남았습니다. "유다"라는 이름 자체가 "찬송하다, 고백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형편은 하나도 바뀌지 아니했지만 시선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조용히 "레아의 출산이 멈췄다"라고 기록합니다.
이 유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야곱은 임종의 자리에서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49:10)라고 축복했고, 그 지파에서 다윗이 나왔고, 마태복음의 족보는 유다와 그의 형제들로 이어지며, 요한은 마침내 "유다 지파의 사자"를 보았습니다(계 5:5). 사랑받지 못한 여인의 넷째 아들에게서 메시아의 길이 열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조건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런 분이 오셔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미천한 자리에서 시작된 계보가 결국 미천해 보이는 구주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미 그 자리를 지나가신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를 지나가셨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레아가 믿지 못한 남편의 사랑보다 훨씬 크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하루 두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자리를 하나님이 이미 보고 계십니다. 둘째, 그 자리에서 사람의 이름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레아가 넷째에 이르러서야 했던 그 고백을, 우리는 오늘 새벽 그 첫마디로 시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오늘 이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람 앞에서 두 번째로 밀려난 자리에서도 우리를 보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의 사랑으로 채우려는 마음을 오늘 주께서 돌이키게 해 주시고, 유다의 이름에서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의 초라한 자리에서도 주님의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