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세기 35장 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제야 벧엘로 올라갑니다"라는 제목으로 새벽에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제 우리는 야곱이 세겜 땅에 장막을 치는 자리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때 제가 말씀드린 것이 있죠. "아직 벧엘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 문장이 닫히는 자리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미루어 두었던 약속이 있습니까? 잊은 것이 아니라 미루어 둔 것 말입니다. 잊었다면 마음이 편하지만, 미룬 것은 가끔씩 떠오르고,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감정도 생깁니다. 오늘 야곱이 딱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첫째, 잊은 것은 야곱이었고 기억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지난날 야곱은 도망자였습니다. 형을 피해 밤길을 걷다가 돌을 베고 잠을 잤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야곱은 깨어나 서원했습니다.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나안에 돌아온 뒤로도 여러 해를 벧엘에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세겜의 땅을 사고 거기서 제단까지 쌓았습니다. 제단은 쌓았는데 그곳은 벧엘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약속한 그 자리로 가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집안이 무너졌고, 야곱의 입에서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네가 서원한 것을 지키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상기시키지 아니하시고,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라고 그때의 처지를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네가 아무것도 없이 도망치던 그 밤, 내가 너를 찾아갔던 그 자리로 오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상담이나 권면을 할 때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매튜 헨리라는 목회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수록 우리가 소홀히 해 온 일을 기어이 생각나게 하신다. 밀어 둔 약속이 자꾸 떠오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짐을 싸지 않습니다. 먼저 집안 사람들을 모으고 말합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 정결하게 하라. 옷을 갈아입으라." 이것을 보면,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그 집에 이방 신상이 있었습니다. 원문은 그것을 "낯선 것들의 신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곱은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도 드렸지만, 낯선 것들을 계속 가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오래 데리고 다니다 보니 더는 낯설지 않게 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내어놓은 물건 중에는 귀고리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것은 장신구가 아니라, 악한 것을 쫓아 준다고 믿어 귀에 달았던 부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만일을 대비해 하나쯤 달고 다녔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것이 하나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있어야 내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 것이 있다면 오늘 다 내려놓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받아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 버렸습니다. 버린 것이 아니라 묻었습니다. 다시 주울 수 없는 곳에 둔 것입니다. 그러자 그토록 야곱이 무서워하던 이웃들이 이번에는 야곱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야곱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방 고을들로 야곱을 이방인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이웃들을 두렵게 만드심으로 야곱을 높여 주신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둘째, 벧엘이 아니라 엘벧엘이었습니다. 드디어 야곱이 벧엘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이름을 짓는데, 이름이 달라졌습니다. 벧엘이 아니라 엘벧엘입니다. 지난날 그 밤에 야곱은 그 자리를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른 이름은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입니다. 차이가 보이십니까? 젊은 날 야곱은 장소의 이름을 불렀고, 늙은 날 야곱은 그 장소에 계신 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야곱에게서 바뀐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 "집"에서 "그 집에 계신 분"으로 눈이 옮겨진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얻는 위로는 벧엘, 곧 하나님의 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엘벧엘, 곧 그 집에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벽마다 이 자리에 나오시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벧엘에 나와 있는 것입니까, 엘벧엘을 만나기 위해 나와 있는 것입니까? 교회를 만나러 나온 것입니까, 그 교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러 나온 것입니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름입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이미 얍복 강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확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새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이름을 밝히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엘 샤다이)." 약속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붙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땅과 후손의 약속을 다시 알려 주십니다. 이것은 야곱이 우상을 묻었기 때문에 받은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홀로 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주에 예배의 목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러 나오지 마시고 그분을 만나러 나오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이미 그분 안에 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오늘 야곱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묻었고, 갈아입었고, 올라갔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복음을 설명할 때 바로 이런 방법을 씁니다. 골로새서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라고 하고, 갈라디아서는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했던 바로 그 두 가지입니다. 야곱은 자기 손으로 우상을 묻었지만, 우리를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대신 묻히셨습니다. 갈아입을 옷도 우리가 지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입혀 주신 옷입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짐을 싸고 식솔을 이끌고 그 길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엘벧엘 되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가 밀어 두었던 그 자리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미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이 새벽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그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을 주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밀어 두었던 그 자리를 오늘 아침 다시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손에 지니고 있던 낯선 것들을 묻게 하시고, 새 옷을 입혀 주신 주님 앞에 옛 옷을 벗어 놓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서 예배를 의지하지 않고, 이 자리에 계신 주님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보다 먼저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