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통해 "약함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계단을 오르면 금방 숨이 차고, 조금만 일해도 피곤이 몰려오고, 젊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던 일이 이제는 버겁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몸 따로 마음 따로 논다"라고 표현합니다. 젊었을 때는 열심히 공을 따라가는데, 나이가 들면 마음은 따라가는데 몸은 따라가지 못해 앞으로 꼬꾸라지고 넘어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종종 이런 착각을 합니다. "믿음이 좋으면 몸도 강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나는 기도해도 이 연약함이 사라지지 않는가?" 육신의 연약함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고백을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지 아니하고 오히려 드러내며,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7-8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연약함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히 권력이 있거나 재물이 많거나 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약함을 인정하면 손해가 오고 가진 것을 잃을까 걱정하여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도 어쩌면 그렇습니다. "우리 목사님 기도도 하시는데 왜 아프지? 왜 자녀들이 잘 안 되지?" 하는 성도들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나약함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영웅주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김일성입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 행적을 다 위대하게,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실수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고, 연약한 것도 없습니다. 지도자나 유명인의 자서전을 보면 연약한 것은 다 감추어져 있고 잘한 것만 드러나 영웅주의를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그는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합니다.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은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간절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누가 듣습니까? 옆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기도에서는 숨길 것도, 강한 척할 것도, 괜찮은 척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다 정직하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님 걱정 안 시키려고 아파도 안 아픈 척하고, 부모는 자녀 걱정할까 봐 힘들어도 티를 안 냅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이, 목사와 성도가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함께 내려놓고 기도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12장 1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영적으로 삼층 하늘에 올라가 크고 놀라운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런 깊은 체험을 한 상태에서도 그는 "내가 연약합니다. 내게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우리는 큰 업적을 이루면 "굳이 약함을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둘째, 그렇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이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가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시가 있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기도한 그대로의 응답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때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 그 문제에 함께하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족하도다"라는 말의 시제는 과거도 현재도 아니고,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되어 온 완료 시제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응답은 "과거에도 내가 너에게 충분히 은혜를 주었고, 순간순간마다 계속 주었고, 지금까지도 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네가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는 이 순간까지도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내가 기도한 그 응답을 주시지 아니하여도, 그 기도의 내용에 늘 함께해 주신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의 답을 자기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밖에서 오는 은혜에서 구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곧 헬라 문화 속에서 영지주의가 가득한 사람들은 문제의 해답을 자기 속에서 찾고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구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치료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질병과 연약함을 놓고 기도할 때 완치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치료가 아니라 은혜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바울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질병과 고난과 고통이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해결되지 아니하여도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 —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이 연약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왜 내가 기도했는데 낫지 않을까?"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왜 기도했는데 직장을 안 주실까? 왜 형통케 안 해 주실까? 왜 부흥이 안 일어날까?"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은혜이고, 우리가 취해야 할 모습입니다.
바울이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라고 감사의 고백을 드린 것은, 육체의 가시가 사라져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그 가시를, 육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가시를 가짐으로 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연약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더 강건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사도 바울은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그 통로로 하나님이 계속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연약함이 강함으로 덮이고, 부족함이 응답으로 채워지고, 소원이 은혜로 채워지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통로가 막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번 한 번만 응답해 주시면 더 열심히 믿겠습니다"라고 기도하지만, 정작 응답받으면 신앙이 더 뜨거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식어지고 느슨해지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질병을 놓고 기도원도 찾아가고 금식도 하고 예배도 참석하다가, 그 질병이 다 나으면 그 열정이 그대로 갈까요? 오히려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더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인정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둘째, 그 연약함 가운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가운데서도 나와 항상 함께 계셨구나. 이전부터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구나." 마지막으로,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연약하지만 연약한 자를 위해 기도하고, 내가 가난하지만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풍성할 때, 나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더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괜찮은 척, 강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는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도 바울이 약함을 자랑한다고 결단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약함 속에서 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모습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