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에 닫힌 하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고 부르짖었고, 에스겔은 포로된 땅에서 오히려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이야기인데, 사람이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조금 의외입니다. 축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라기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100년쯤 지난 시점입니다. 성전은 다시 세워졌고 절기도 지켜지고 예배도 어김없이 드려졌습니다. 겉으로 보면 다 회복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창고가 비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을 보면, 십일조가 들어오지 않으니 성전을 섬겨야 할 레위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 성전을 떠나 밭에 나가 일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전의 문은 열려 있는데 그 안에서 섬길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라고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이것이 무너지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그대로 드리고, 기도도 그 자리에서 하고, 봉사도 그대로 합니다. 그런데 서서히 창고가 비어 갑니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각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당뇨병이 무서운 것은 감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발에 괴사가 생겨도 감각이 없으니 모르고 지나가다가 결국 다리를 절단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도 "누구의 탓입니까?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라고 되물으며, 성전이 비어 있는 것에 전혀 감각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6절 말씀을 봅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생각할 것은 순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기 전에 먼저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변하지 아니하였는데 너희는 변하였다"라는 뜻입니다. 1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잘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너희 조상들의 날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고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몇 세대에 걸쳐 어긋나 있었는데도 멸망당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야곱의 자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야곱의 자손"이라 부르십니다. 야곱은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사람, 속이고 빼앗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 이름 옆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괜찮아서 붙드시는 분이 아니라, 붙드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붙잡고 계십니다. 종교개혁자였던 칼빈은 "하나님이 불변하심이 아니었다면 이 백성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내 신앙의 일관성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 그래프를 그려 보십시오. 올라갔다 내려갔다, 뜨거웠다 식었다, 결심했다 무너졌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돌아오라"는 가던 길에서 방향을 완전히 틀어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나님 자신에게도 쓰십니다. 등을 돌린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인데,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돌아오면 나도 돌아가 너희를 받아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돌아오라"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돌아올 때, 멀리서 보고 달려간 것은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껴안고 입을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백성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겠나이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상태가 아니라, 죄인인 줄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상처는 아프면 치료가 되지만 감각이 없으면 썩는 줄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기도할 때 "하나님,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을 알려 주시옵소서. 몰랐던 죄가 있었습니까?"라고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회개는 아는 죄를 처리하는 데서 시작되지만, 회복은 모르는 죄를 정리할 때 시작됩니다.
둘째, 도둑질이라는 고발입니다. 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도둑질"이라는 단어는 가난한 자의 것을 강탈하는 아주 거친 표현입니다. 후대에 성경을 필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친 단어를 쓰지 아니하실 것이다" 하여 어감이 약한 말로 바꾸기도 했는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거친 단어를 그대로 강하게 쓰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잃어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시편 50편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것을 도둑질하였다"라는 것은 금액을 도둑질했다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을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소산과 재산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액수를 다 채우면서도 도둑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계산기까지 두드리며 정확히 십분의 일을 떼어 놓았지만 정작 사람을 짓밟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그러므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시는데, 드리는 손과 사는 삶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여기 "저주"는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언약의 조건입니다. 신명기 28장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비와 소출이 풍성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가뭄과 흉작이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즉흥적으로 흥분하셔서 하신 말이 아니라 이미 명문화된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헌금을 안 하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말라기서에서 말한 저주는 이미 갈보리 십자가로 끝났습니다. 그렇다고 "헌금을 안 해도 저주를 안 받는구나" 하고 말을 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유는 저주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저주는 이미 처리되었고, 이것을 뒤집으면 감사가 됩니다. 저주가 두려워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받을 것을 계산하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불행한 일을 안 당하겠지" —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보험료입니다. 값은 이미 치러졌기에, 우리가 드리는 것은 값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만약 십일조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성경에 "감사"라는 단어보다 "십일조"가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몇 번 나오지 않고, 감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주를 피하려고 드리면 종교가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면 감사가 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하나님이 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굶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고의 양식이 끊기면 하나님이 굶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웃이 굶고 공동체가 굶습니다. 창고가 풍성하면 이웃이 풍성해지고, 비면 이웃이 굶주립니다. 이것이 나눔의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겠다"라고 하시는데, 원어는 "하늘의 창문"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 쓰였는지 아십니까? 창세기 7장 11절, 노아의 홍수 때에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일 밤낮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심판의 장면과 정확히 같은 표현이 말라기서의 "하늘의 창"입니다. 한 번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또 한 번은 복을 주시기 위해 하늘의 창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창문은 언제 열립니까? "너희가 돌아오면" 열립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는 것뿐 아니라 그 복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 수입이 많은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 잘못된 곳에 지출되는 것을 막아 주시는 것도 축복입니다.
이 약속이 언제 응답되었는지 아십니까? 400년의 침묵 후에 응답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도 못 기다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사고를 쳤는데, 이스라엘은 400년간 하늘이 잠잠한 것을 견뎌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이 약속을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3장, 요단강물에서 예수님께서 올라오실 때 다시 하늘이 열립니다. 그 하늘의 열림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성취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끝내 드리지 못한 온전한 십일조를, 예수님께서는 그 전부를 드림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는 열에 하나도 아까워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열의 열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하늘을 열기 위해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열린 하늘 아래에서 드리는 사람입니다. 지난주 이사야처럼 "하늘을 찢어서라도 내려오소서"라고 기도했지만, 결론은 하늘이 이미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은혜와 복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너희가 돌아오기만 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에서는 "그 복으로 너희가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열방이 너희 하나님을 알게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로 인하여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 하신 것처럼, 받은 복을 이웃과 열방에게 흘려보내라는 것이 말라기서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일은 하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우리가 등을 돌린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언약의 저주를 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치심으로 다 받아 주셨고, 그 주님을 통해 하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돌아가는 것, 창고를 채우는 것,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을 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열린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나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우리의 신실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드린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빼놓았던 날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다 지셨음을 믿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계산이 아니라 고백으로 드리게 하시고, 우리에게 부어 주신 것이 우리 안에 고이지 않고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통하여 열방이 주님을 복되다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