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이사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라 부르짖었고, 에스겔은 포로된 땅에서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람이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때는 포로 귀환 100년쯤 지난 시점입니다. 성전은 다시 섰고 절기와 예배도 드려지는데, 성전 창고가 비어 있습니다. 십일조가 들어오지 않아 레위인이 성전을 떠나 밭으로 돌아갔습니다(느 13:10-11).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배도 기도도 봉사도 그대로인데 서서히 창고가 비어 가고,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로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 — 감각이 사라진 것입니다(당뇨병처럼).
책망하시기 전에 먼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3:6) 하십니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너희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100년 동안 이스라엘이 잘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변하시기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니라 '야곱'의 자손이라 부르십니다 — 속이고 빼앗고 도망친 그 이름 옆에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괜찮아서가 아니라 붙드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3:7) — 탕자를 향해 달려간 아버지처럼(눅 15:20), "돌아오라"는 말은 "이미 너를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3:7) —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회개는 아는 죄를 처리하는 데서 시작되지만, 회복은 모르는 죄를 정리할 때 시작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3:8). 이 '도둑질'은 가난한 자의 것을 강탈하는 거친 단어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시 50편), 이는 액수를 떼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다 내고도 도둑질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 — 계산기를 두드리며 정확히 십분의 일을 떼면서 사람을 짓밟았습니다. 드리는 손과 사는 삶이 따로 놀아서는 안 됩니다. 9절의 "저주"는 감정이 아니라 신명기 28장의 언약 조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 말라기의 그 저주는 갈보리 십자가로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드리는 이유는 저주가 무서워서(보험료)가 아니라, 값이 이미 치러졌기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무서워서 드리면 종교가 되고,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면 감사가 됩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3:10). 십일조의 목적은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 하나님이 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굶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고가 비면 하나님이 굶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공동체가 굶습니다. 이것이 나눔의 원칙입니다. "하늘 문"(창)이라는 단어는 노아 홍수 때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창 7:11) 심판이 쏟아진 바로 그 표현입니다. 한 번은 심판의 수문으로, 여기서는 축복의 수문으로 열립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실 뿐 아니라 그 복이 "메뚜기를 금하여"(3:11) 새어 나가지 않게 지켜 주십니다 — 수입만 많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출을 막아 주시는 것도 축복입니다.
말라기의 이 약속은 400년의 침묵 후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림으로 응답됩니다. 우리가 끝내 드리지 못한 온전한 십일조를, 예수님은 전부를 드림으로 채우셨습니다. 우리는 열에 하나도 아까워했는데, 예수님은 열의 열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고후 8:9). 이제 우리는 하늘을 열기 위해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열린 하늘 아래에서 드리는 사람입니다. 회개하고, 창고를 채우고, 시험해 보는 것은 하늘을 여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열린 하늘 아래 사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12절 — 그 복은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니" — 이웃에게, 열방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 위 내용은 설교 요약입니다. 실제 강단에서 선포한 내용과 표현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