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린도전서 4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충성이니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평생 평가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직장에서는 실적과 성과로 평가받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알게 모르게 저울에 올려놓습니다. "저 사람은 열심이다. 저 집사님은 요즘 은혜가 식은 것 같다." 그 평가에 마음이 짓눌리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마 누군가의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칭찬 한마디에 하루가 가벼워지고,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밤잠을 설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의 저울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누구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그로 인해 기뻐하기도 질투하기도 합니다. 고린도는 계층과 신분과 서열이 매우 다양했고, 사람들은 거기에 민감했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 말을 잘하고 못하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값어치가 나뉘었습니다. 그 세속 문화가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1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평가하기 전에,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라는 것입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맡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라고 말합니다. "일꾼"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두루마리를 읽으신 후 그것을 받아 제자리에 둔 사람(눅 4:20),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에 수종 들었던 마가 요한,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16절에서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시며 "너를 종과 증인으로 삼으려 함이라"라고 하신 그 말에 쓰인 단어입니다. 공통점은, 자기 일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일꾼입니다. 그것은 결정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하는 자입니다.
둘째, 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곧 청지기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노예부터 관리까지 천차만별의 신분이 있었는데, 청지기는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재산은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대로 일을 하고 그것을 운영하고 다루지만, 그 재산은 주인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표현은,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그 창고 안 물건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인들은 창고 앞에서 열쇠를 가진 사람들의 손 모양, 열쇠의 모양을 보고 "누구는 게바파, 누구는 그리스도파, 누구는 바울파"라며 서로 판단하고 나눕니다. 정작 창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수박 속과 겉 색깔이 다른데, 겉만 보고 "이것이 최고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일꾼, 청지기가 요구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충성입니다.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과도, 규모도, 재능도, 인기도, 웅변도 아닙니다.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 내 창고를 그대로 맡길 수 있는 사람인가"를 봅니다. 청지기는 본래 주인이 자리에 없을 때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보는 앞에서, 감독하는 눈이 있을 때 잘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요령입니다. 주인이 멀리 떠나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충성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2절에서 예수님께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예배가 끝나고 다 돌아간 뒤 남아서 의자를 정리하는 분, 아무도 알아본 적 없는 새벽 기도 자리를 계속 지키는 분, 병상에 누운 성도를 조용히 찾아가 손을 잡아 주는 분. 그분들은 이름이 주보에 실리지 않고 어느 통계에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니 여러분도 충성하십시오"로 끝나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저울이 될 뿐입니다. "새벽 기도 자리를 지키십시오, 청소하십시오, 심방하십시오, 더 열심히 하십시오"로만 끝난다면 또 다른 저울입니다. 히브리서 3장은 이 땅에 오신 참 청지기가 누구인지 말씀합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하였으나,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신실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생각할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 위에 세워진 충성입니다. 이를 악물고 참아 내는 노력이 아니라, 이미 끝까지 충성하신 주님의 충성 위에 우리가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충성은 흔들리고 연약해질 수 있지만, 기초로 쌓아 놓으신 그리스도의 충성은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그 든든한 기초 위에서 우리는 다시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누구 앞에 서는가?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를 직역하면 "사람의 날"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날"과 "주님의 날"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날에 판단받고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날에 우리가 행한 일들이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신실한 청지기인가? 주인이 명령하신 것에 순종하는 일꾼인가? 주인이 맡겨 둔 창고를 잘 지키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충성 위에 온전히 세워진 충성스러운 청지기인가?" 그런데 그 결말은 정죄가 아닙니다. 5절에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일꾼의 사명,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내가 못했다, 부족했다"가 아니라 칭찬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충성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은혜를 받기 위한 보상이나 대가의 노력이 아닙니다. "충성하면 대가를 받는다"가 아니라, 이 충성은 내가 믿는 그 믿음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말씀합니다. 충성은 조건이나 보답의 대상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믿음은 어디에 세워진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충성 위에 세워진 우리의 충성입니다. 주 안에서 더 충성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맡은 자임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하고, 우리 손에 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잊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신실하게 행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굳건한 믿음을 더하여 주셔서, 든든하신 그리스도의 충성 위에 우리 믿음의 열매를 더욱 세워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