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강해 · 2026.08.19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린도전서 4:14-21 · 고린도전서 강해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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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린도전서 4장 14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똑같은 말인데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너 요즘 왜 그래?"라는 말을 잘 모르는 사람이 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면 똑같이 마음이 아프긴 한데 이상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내용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 중반까지 고린도 교회를 아주 아프게 찔렀습니다.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라"(3:3),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도다"(4:8).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뼈아픈 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얼굴이 붉어지고 점점 굳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를 미워하는구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이 편지를 썼구나." 그런데 14절에서 갑자기 바울의 태도가 바뀝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바울은 1장부터 4장까지 채찍질하고 꾸짖고 상처를 준 그 말의 출처를, 14절부터 21절까지 설명합니다.

첫째, 낳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 "권하려 한다"를 직역하면 "마음에 놓아 준다", 곧 정신을 차리게 해서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표현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주저앉히는 말이 있고, 정신 차리게 해서 일으켜 세우는 말이 있습니다. 내용은 똑같이 아플 수 있지만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어떤 말은 그 사람을 완전히 주저앉히고, 어떤 말은 정신 차리게 해서 바로 세웁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지적할 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내 말은 상대방을 주저앉히는 말인가,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말인가"입니다.

바울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까?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 "일만 스승"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이해하는데, 원어는 당시 로마 사회의 "파이다고고스"라는 종을 가리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아이가 학교에 갈 때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부모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 행실을 감독하는 노예 신분의 인솔자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 주변에 너희를 감시하고 지적할 사람은 많다. 그런데 너희 때문에 밤에 잠 못 자고 아파할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무너지고 흔들리는 이유는 지적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적하는 사람은 언제나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아파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낳았다"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낳았습니까? "복음으로" 낳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그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도구를 쓰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을 굳이 사람의 입을 통해 하십니다. 하나님이 전도하실 줄 몰라서, 잃어버린 영혼을 부르실 줄 몰라서 우리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입술을 통해 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우리에게 보여 줄 삶이 있느냐입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기록합니다. 바로 앞 4장 9-13절에 "우리가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친히 손으로 일하며, 욕을 먹은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세상의 더러운 것같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합니다.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은 내가 성공한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고 핍박받고 세상의 더러운 것같이 된 그 환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방법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고난과 핍박을 당하셨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그러한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며 "이는 나의 행사라"라고 말합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보고 너희에게 갈 때 "나의 행사", 곧 내가 걸어왔던 길을 전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바울이 살아온 모습입니다. 때로는 편지로 전달할 것이 있고, 사람이 직접 가야만 전달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할 말은 잊혀도 우리가 걸어간 길은 그들이 기억합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모습으로 살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기억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은, 어떤 교리나 말보다 내가 살아오며 너희에게 보여 준 그 모습을 기억하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18절에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말합니다. 여기 "교만하여졌다"는 빵 반죽이 부풀어 오르듯 속은 비었는데 겉만 커지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4장 6절, 18절, 19절, 5장 2절에도 나옵니다. 왜 고린도 교인들이 교만해졌습니까? 바울이 안 온다고 하니, 자기들이 한 행동에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책임자가 있으면 열심히 하는 척하는데 없으니 뭐든지 다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대장 노릇을 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슬그머니 커질 수 있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라"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표현에서, 바울조차 자기 일정과 계획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교만하다"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말솜씨가 아니라 나의 계획 위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나의 계획과 생각에도 주님이 우선이 되는 것이 겸손입니다. 말로만 "저는 못합니다, 저는 약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20절에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당시 고린도 교회의 자랑은 "말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 문화권에서 웅변이 곧 실력이었습니다. 바울은 "말"이라는 저울의 반대편에 "능력"을 얹어 놓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복음이 한 사람을 실제로 바꾸어 놓는 힘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기록합니다.

말은 배우면 됩니다. 책을 읽으면 어휘가 늘고 훈련하면 표현이 세련되어집니다. 옛날에는 "부흥사 속성 훈련원" 같은 것이 있어서, 누구의 말투나 억양을 3개월, 6개월 속성으로 훈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라고 하는 것은,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가,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가, 도저히 용서 못하던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힘이 없고 그저 뒤에서 판단하고 조롱하고 수군거리는 것은, 아무리 말을 잘하고 지식이 많아도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참으로 낳아 주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복음으로 낳아 주신 아버지, 바로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그 부끄러운 것을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기록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기록합니다.

21절에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내가 매를 가지고 갈 것인가,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갈 것인가?" 우리를 위해서는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매는 우리가 맞지 아니하여도 되는데, 예수님께서 고난과 고초와 부끄러움을 당하며 그 매를 대신 다 맞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 문은 바로 사랑과 온유의 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지적할 사람은 만 명이 있어도 아파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파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나아가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사랑과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를 낳으신 그 사랑을 다시 알게 하시고, 우리는 지적할 말은 많으면서도 아파할 마음이 적었음을 고백합니다. 남의 허물은 밝히 보면서 그를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밤은 드물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부끄러움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향해 들려야 할 매를 홀로 다 맞으신 우리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 은혜 위에 서서 우리도 서로를 세우는 말을 하게 하시고, 말에 머물지 않고 능력에 이르는 신앙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 교회 안에 감시자보다 아버지가 많아지게 하시고, 우리가 걸어간 길이 다음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적용

  • 1누군가를 지적하기 전에 물으십시오. "내 말은 저 사람을 주저앉히는가, 일으켜 세우는가?"
  • 2교회 안에서 감시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기를 구하십시오. 지적하는 자리보다 아파하며 기도하는 자리에 서십시오.
  • 3내 신앙이 말에 머무는지 능력에 이르는지,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용서할 수 있는가로 점검하십시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낳으신 그 사랑을 다시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지적할 말은 많으면서도 아파할 마음은 적었음을 고백합니다. 남의 허물은 밝히 보면서 그를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는 밤은 드물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부끄러움을 대신 지시고, 우리가 맞아야 할 매를 홀로 다 맞으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 은혜 위에 서서 이제 우리도 서로를 세우는 말을 하게 하시고, 말에 머물지 않고 능력에 이르는 신앙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 교회 안에 감시자보다 아버지가 많아지게 하시고, 우리가 걸어간 길이 다음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유튜브 자동자막을 정리한 설교 전문입니다. 실제 낭독 내용과 표현·인용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